brunch

젖은 비로 닿은 이천 년의 도시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일 차

by 달여리
일라라스/우르다니스~팜플로나(≈17.42km)


제대로 자긴 했던가. 이도저도 아닌 선잠이었다. 잠깐씩 빠져든 꿈은 죄다 악몽이었다. 피곤함에 더해 마음까지 뒤숭숭했다. 유령처럼 일어나 우선 밖으로 나왔다. 스트레칭이라도 좀 하고 싶었다. 로비엔 한국 요리 에이스 미국인 청년이 이미 나와 있었다. 굿모닝, 잇츠레이닝. 그러면서 울상을 짓는다. 나도 덩달아 울상을 지었다.


비가 내렸다. 많이도 내린다.


채비를 했다. 물을 마시고 세수를 했다. 배낭도 마저 꾸렸다. 어느새 모든 순례자들이 다 깼다. 조식은 7시부터였다. 둥글게 모여 앉아 두런두런 식사를 즐겼다. 토스트에 주스와 커피가 제공되는 단순한 메뉴였다. 주인장에겐 어제 찍은 고양이 오링 사진을 보내드렸다. 눈썹을 추켜올려 말없이 서로를 응원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다들 일찍이 순례를 떠나셨다. 순식간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숙소에 남고 말았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비가 그치길 기다려봤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8시 반에서야 겨우 길을 나섰다. 한숨을 쉬며 우비를 덮어썼다. 뒤로 손을 흔들어 주인장과 오링에게 먼 인사를 건넸다.


아디오스(Adios).

<비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5분 남짓, 마을을 빠져나와 순례길로 합류했다. 딩- 딩- 말의 목줄에 달린 종소리가 축축이 울렸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그 구슬픈 음색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빗물을 머금은 발자국 소리가 크다. 비가 와도 어김없이 새는 지저귀었다. 안개 낀 주변 산세가 그래도 운치 있다. 길 따라 계곡도 흘렀다. 숲을 거치며 마을을 지나고 또 지났다.


10시, 네 번째 마을 Zuriain을 통과한다. 한 식당에는 늦은 아침을 즐기는 순례자들이 바글거렸다. 쉴까 말까, 그냥 지나쳤다. 그 뒤로도 비슷비슷한 길이 계속 이어졌다. 왜인지 도로를 따라 진한 허브향이 났다. 고양이가 많던 Irotz 마을도 지났다. 이번엔 골목에서 군고구마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부실한 조식 탓인지 벌써부터 배가 고팠다. 첫째 날 부르게테 슈퍼에서 산 사과를 걸으며 먹었다. 급한 허기는 일단 그걸로 진정이 됐다.


강을 건넜다. 좁은 길 따라 진흙을 피해 요리조리 걸었다. 한적한 건물을 지나 굴다리를 통과했다. 11시, 마침 비를 피할 쉼터를 만났다. 우비를 벗고 배낭을 내려놨다. CTC때 산 에너지바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달콤한 맛에 취한다. 그렇게 20분간 가만히 비를 구경했다. 다시 저 빗속으로 들 엄두가 안 났다. 몸이 젖어 그런지 더 앉아있기엔 좀 추웠고, 그렇다고 여기서 오늘의 길을 멈출 재간도 없었다. 그러니 움직여야 했다. 정말 싫은 기분으로 눅눅한 우비를 억지로 껴입었다.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꼴에 비도 땀도 축축한 건 딱 질색이다.

<비를 맞으며 큰 마을로 다가선다>

비는 결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심 그치길 기대했던 마음을 이제 완전히 접었다. 숲을 헤치고 나서자 차들의 왕래가 잦은 도로 옆 산책길이었다. 다들 어디 숨어있다 나온 건지, 여기서부터 갑자기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큰 마을로 다가서는 듯한 분위기가 곳곳에 서려있었다. 어쩐지 다들 발걸음이 빨라졌다. 약간의 설렘마저 느껴지는 동작들이었다.


12시. 계곡 물소리 가득한 Burlada에 도착했다. 종착지 전 마지막 마을이다. 다리를 건너자 긴 골목이 뻗어있었다. 촘촘한 건물들이 가지런하게도 나열되어 있다. 걸을수록 거리는 조금씩 분주해져 갔다. 조금 더 나가자 아예 번화한 거리가 확 펼쳐졌다. 이쯤이면 도시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신호등을 기다려 횡단보도를 건넜다. 도로엔 시내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식당과 슈퍼도 많았다. 인파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만하면 번화했다. 사실 마을의 경계가 어딘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미 팜플로나(Pamplona)로 들어선 건지도 몰랐다. 프랑스길의 거점 중 제일 규모가 큰 곳이니 그럴 만도 했다.


올라(Hola)!


주민들은 다정한 인사를 건네왔다. 향긋한 냄새에 이끌린 빵집에서 맛있는 크로와상도 사 먹었다. 헷갈릴 수도 있을 만큼 복잡한 거린데, 순례길 표지가 잘 되어 있어 전혀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환영받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내내 비를 맞아 우울했던 마음이 분주함을 만나 활짝 펴졌다. 도시를 만나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줄은 몰랐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이 도시를 걸었다. 길은 팜플로나 구시가지로 서서히 다다르고 있었다.

<Burlada를 지나 서서히 팜플로나로>

기원전 1세기 로마시대에 세워진 팜플로나는 9세기 중엽 중세시대 나바라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헤밍웨이의 첫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의 배경이 되며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카스티요광장(Plaza del Castillo)에 있는 카페 이루냐(Iruña)는 헤밍웨이가 즐겨 찼던 곳으로 유명하다. 무려 1888년부터 지금까지 성업 중이라고 하니, 시간이 된다면 한 번쯤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성싶다.


막달레나 다리(Puente de la Magdalena)를 건너 성벽 안으로 들어서면 오래된 도시가 동화처럼 펼쳐진다. 고딕 성당과 오래된 돌길이 무척 아름답다. 생장에서부터 프랑스길을 시작한 순례자들이 처음으로 만나는는 대도시다. 인구 20만 명이라고 하니, 18만 서귀포보다 인적 규모가 약간 더 큰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사는 곳이 서귀포니 감을 잡으려면 서귀포랑 비교할 수밖에.)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변화가를 벗어나 한적한 길을 얼마간 걸었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눈앞에 턱 하고 시커먼 성곽이 나타났다. 배낭을 멘 사람들을 따라 막달레나 다리를 건넜다. 성곽을 낀 잔디밭을 이어 성의 입구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섰다. 성벽을 따라 올랐다. 프랑스문이라고도 불리는 수말라까레기의 문(Portal de Zumalacárregui)도 통과했다.


성곽 안으로 드러난 건 복잡한 골목을 한 작은 마을이었다. 단박에 예뻤다. 성 안의 중세 마을이라니, 내 빈약한 정보에 빗대어 결코 상상치 못한 장면이었다. 갑자기 전혀 낯선 곳으로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모르는 새에 어쩌면 시간을 거슬러 온 걸지도 몰랐다. 날씨마저 흐리고 축축해, 모든 장면은 한꺼풀씩 뿌옜다.


그렇게 팜플로나 구시가지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도 보이고, 슈퍼랑 식당도 보였다. 예약한 숙소는 팜플로나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la Real)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겨우 오후 1시였다. 체크인을 하고 바로 샤워와 빨래부터 했다. 쾌적한 몸으로 커피도 마시며 세상 여유를 부렸다. 일찍 도착했더니 시간이 차고 넘쳤다. 또 터진 무릎보호대를 꿰맸다. 오랜만에 한국과의 긴 통화도 했다. 인터넷을 아주 마음껏 즐겼다.


산책 삼아 대성당에도 가봤지만 입장료가 9유로라 포기했다. 어디선가 순례자는 3유로로 들어갈 수 있다고 봤는데, 물어보니 아니란다. 그래서 순례자 여권에 도장(세요, sello)만 찍었다.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계속 내린다.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내렸다. 팜플로나를 제대로 구경해 보고 싶은데 엄두가 안 났다. 잠깐 걸었는데 금세 또 다 젖었다. 근처의 슈퍼에 들러 식사 거리만 대충 사 왔다. 비가 그치길 바라며 로비에 앉아 이러쿵저러쿵 시간을 보냈다.

<계속된 비에 골목 구경은 포기했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제주올레길 팸플릿>

아무래도 빨래가 마를 것 같지 않았다. 날씨가 이런데, 건조장 환경조차 습하고 협소했다. 축축한 빨래감만큼 싫은 게 또 없었다. 숙소에 물어 결국 코인 세탁방을 찾았다. 마침 빈 건조기가 있어 바로 돌릴 수 있었다. 12분 만에 바싹 말랐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1.5유로의 작지만 큰 행복이었다.


냉동식품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근처의 바에서 맥주를 마셨다. 너무 준비 없이 오긴 했나 보다. 매일이 미정인 산티아고 길의 루트에 대해서도 이참에 대충이나마 알아봤다. 내일은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그다음은 에스테야(Estella)까지 가면 될 것 같았다. 아마 그게 일반적인 순서인 듯했다. 고민하다 푸엔테 라 레이나 숙소는 먼저 예약해 두었다. 보통 하루 이틀 초반을 제외하고는 예약 없이 다닌다고들 하는데, 성격상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게 아직까진 속이 편했다.


비는 계속 올 모양이었다. 내일 비 예보가 없는 걸 보니, 아마 새벽쯤이면 그치지 않을까 싶었다. 날씨 탓에 카메라를 거의 꺼내지 못한 오늘은 어쩐지 허전했다. 사진을 찍고 싶다. 부디 예보가 맞길 바랐다. 온종일 맞은 비에 지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 비오지 않은 게 어디야.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쯤이면 무난했지. 럭키비키다.


내일은 일찍 출발해 볼까 한다. 그래봤자 일곱 시 언저리쯤이겠지만. 스스로를 믿고 굳이 알람은 맞추지 않았다. 되도록 늦지 않게 잠자리에 누웠다. 다들 바쁜지 대부분의 침대엔 사람 없이 짐만 있었다. 이왕이면 일찍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철제 침대는 유달리 삐걱거렸다. 두서없이 오가는 사람들의 소음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어젯밤도 제대로 못 잤는데 또 왜일까. 눈을 감고도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2024.10.02.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일 차(누적거리 66.78km)

오늘 하루 30,759보(23.5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a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