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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여름처럼 뜨거워 역시 맥주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5일 차

by 달여리
푸엔테라레이나-에스테야(≈21.99km)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젯밤 눕자마자 기절했다. 코를 많이 골았을지도 모르겠다. 깊은 늪으로 빠지는 듯한 잠이었다. 순식간에 밤이 지나갔다. 알람도 없는데 여섯 시 반에 깨어난 건 거의 기적과도 같았다. 미뤘던 잠을 충분히 잔 게 분명했다. 몸이 한층 개운했다.


번뜩 일어나 침낭부터 조심히 접었다. 나머지 짐을 모두 들고 복도로 우선 나왔다. 자기 전 침낭을 제외하곤 이미 배낭을 다 꾸려놓았다. 세수를 하고 복장 채비까지 마쳤다. 이미 주방엔 몇 분이 계셨다. 삶은 계란과 설익은 바나나,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 넉넉히 시간을 보내다, 여덟 시 이십 분쯤 여유롭게 길을 출발했다. 동은 진작에 텄다. 밝은 아침은 신선한 공기로 가득했다.

<Puenta la Reina를 빠져나간다>

왕비의 다리를 건넜다. 과거를 여기 두고 미래일 현재로 나아간다. 불쑥 다가온 고양이가 다리를 부비부비, 헤어짐의 인사를 다정히도 해주었다. 날씨가 좋다. 춥진 않은데 손은 시렸다. 이른 아침인데도 어디선가 파프리카 굽는 냄새가 흘러들었다. 도로를 떠나 갓길로 들어선 뒤에도 그 냄새는 끝까지 길을 따라왔다. 푸엔테 라 레이나를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앞과 뒤로, 걷는 이들이 꽤 많았다.


숲으로 들자 곧 오르막이 시작됐다.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엎치락뒤치락하며 함께 나아갔다. 간격은 조금씩 벌어져 서서히 낱낱으로 흩어진다. 도로 곁의 오솔길을 지나고, 추수가 끝난 밀밭 옆도 지난다. 적갈색의 흙빛이 짙었다. 길가엔 제초작업이 한창이었다. 곧 첫 마을 Mañeru가 나왔다. 문을 연 카페에는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건물마다 창문들이 예뻤다. 다시 밭길을 걸어 다음 마을로 향한다.

<Mañeru와 Cirauqui 마을과 그 사이>

어제부터 죽은 해바라기밭을 자주 지난다. 꽃이 만발했을 7월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부러운 마음으로 그저 상상만을 해본다. 언덕 위로는 뾰족뾰족 사이프러스 나무가 사람처럼 서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파랬다. 마치 여름처럼 햇살은 뜨거웠다.


저 너머로 마을이 보였다. 한데 똘똘 뭉친 그 모습이 마치 하나의 단단한 성 같았다. '나바라의 로마'라고 불리던 Cirauqui 마을이다. 로마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마을 인근에는 고대 로마 도로의 흔적도 남아 있다고 했다. '왕비의 다리'를 건너며 거기 과거를 두고 온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먼 과거로 오고야 말았다. 중세를 넘어 기원전으로 되돌아온 모양새였다. 옛 그림이나 오래된 사진에만 있는 줄 알았지, 이런 마을을 실제로 와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좋은 의미로, 기묘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생소했던 팜플로나와는 또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Cirauqui 마을로 들어선다>

골목골목 눈길이 자꾸 멎었다. 와, 와, 혼자서 계속 감탄을 내뱉었다. 그만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 연신 마음이 오물거렸지만, 에스테야(Estella)까지 가기로 한 계획을 흩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과 기억을 아껴둔 채 겨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길은 마을을 나선형으로 오르도록 나있었다. 건물마다 띤 황갈색의 빛이 유난히 따스하게 시선을 받아주는 느낌이었다. 마을의 정상에 있는 성당에 들러 자그마한 인사를 드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아주 잠시만 쉬었다 간다. 성당 아래를 지나자 곧 마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쉬웠다. 두고두고 미련이 남을 게 뻔했다.


고속도로를 건너 시골길로 들어섰다. 저 멀리 보이는 절벽의 능선이 참 근사했다. 중간에 작은 푸드트럭이 있었고, 먹을 걸 좀 나눠달라는 귀여운 고양이도 만났다. 세뇨리따, 아임쏘쏘리. 딱히 드릴 게 없답니다. 그러면서 몰래몰래 삶은 계란 하나를 까먹었다. 쓰담쓰담. 아, 오늘 벌써 계란만 네 개째였다.


초록 수풀 더미에 벌떼 소리가 크다.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새소리는 맑았다. 굴다리를 지나고 작디작은 개울도 건넌다.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었다. 여지없이 땡볕은 강했다. 뜨겁고 덥지만 그래도 이런 날씨가 오히려 걷기 좋았다. 비 안 오는 게 어디야, 말해 뭐 해 앞으로도 내내 이런 날씨를 바랐다. 비슷비슷한 사람들과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한다. 수십 번의 ‘올라’와 ‘부엔까미노’가 있었다.

<Cirauqui 마을>

오래 걷다 보면 아무래도 무념무상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멍하게 빠져든 스스로를 문득 깨달을 때면, 부러 사진기부터 얼른 들곤 했다. 생각에 갇히느니, 오히려 보는 쪽을 택한다. 봄으로써 다시 걸음을 체감할 수가 있었다. 마음을 머리의 뒤쪽(생각)이 아니라, 머리의 앞쪽(시선)으로 두는 게 내게 좀 더 맞았다. 뭐가 됐건 있는 그대로 온전히 마주하는 게 낫다. 걸음의 힘듦도, 길의 아름다움이나 지루함도, 전혀 진도가 나가가지 않을 상념도 모두 다 마찬가지다.


위클로웨이와 CTC를 거쳐 이곳 산티아고순례길까지, 걸은 날짜만 다 합하면 이제 한 달 정도가 되었을까. 그동안 걸으며 겨우 깨달은 한 가지를 말하자면, 아무리 힘들어도 한 걸음씩 내딛기만 한다면 결국은 다다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걸 잘 안다. 그러니까 그 차이에서 걸음의 묘미가 생기는 건 아닐까 싶었다. 인생에서는 쉬이 얻지 못할 성취감을 길에서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얻을 수가 있다. 그야 걷기만 하면 되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인생에 대한 일종의 대리만족일 수도 있겠다.


'그냥' 걷고 싶어 떠난 길, 걷다 보니 걷는 게 좋아졌다. 목적보다 목적지가 있었다. 그 단순한 방향성만 있는 이 하루들에 마음이 그저 편할 따름이었다. 그게 맞다. 맞았다. 복잡하지 않은 상태에 놓이는 것. 그것 때문에 걷는 게 좋아진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걷기에도 수많은 선택의 기로와 소소한 스트레스, 원치 않는 우연은 쌔고 쌨다. 하지만 하물며 삶을 살기까지 하는데, 그쯤이야 무시할만하지 않은가.

<길이 변주하며 이어진다>

11시 35분, Lorca 마을에 도착했다. 한국인 아내분이 운영하신다는 알베르게 이야기는 까친연 카페에서 봐 익히 알고 있었다. 정말인지 ‘아이스커피’라는 단어에 홀린 듯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친절한 인사와 응원의 북돋음을 받았다. 이십 분간을 쉬어 간다. 어딘지 편했다. 얼음을 와그작 와그작, 황홀하기까지 했다. 나서며 기회가 되면 또 인사드리겠다고 말씀드리니, 내년에 봅시다 그러신다. 허허, 멋쩍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내내 흘렀던 파파로티 음악이 등 뒤로 얼마간 더 따라 나왔다.

<Lorca 마을과 아이스 커피>

마을을 빠져나와 도로 옆길을 걸었다. 낮은 포도밭이 있었다. 그 건너로 추수가 끝난 밀밭도 있었다. 하얀 들판이 펼쳐졌을 이곳을 상상한다. 낮은 밑동의 그을림도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강아지들의 천국, 비야투에르타(Villatuerta) 마을도 지난다. 왈왈-컹컹-멍멍 다양하리만치 갖가지 소리가 들렸다. 요란하게 달려들기도 했다. 담벼락이 없었다면 아주 혼비백산할 뻔했다. 꼴에 강아지는 좀 무섭다.


싱그러운 강을 건너 천천히 에스테야(Estella)로 향한다. 나바라 왕국 시대 때 예술과 상업으로 융성했다는 곳이다. '북쪽의 톨레도'라고 불렸다나 뭐라나. 그러거나 말거나 마지막 힘을 내기 위해 등산 스틱은 경쾌한 멜로디를 쥐어 짜냈다. 탁탁 음음 탁탁 음음.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어느 공장 옆을 지날 땐 진한 맥주 냄새 같은 게 확 났다. 이젠 되도록 맥주를 안 먹어보려 했는데 아- 이러면 또 안되지. 못 이기는 척, 오늘도 그 유혹에 넘어갈 게 뻔했다. 근데 진짜 맥주향이 난 건 맞겠지? 걷고 나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는 정말인지 참기가 어렵다.

<Villatuerta를 거쳐 Estella에 도착한다>

1시 45분, 에스테야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해 둔 사립 알베르게로 곧장 향했다. 좁은 골목골목이 인상적인 스페인의 여느 풍경이었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났다. 오늘의 길이 끝났음을 알리는 메타포와도 같았다. 체크인을 한 뒤 바로 샤워와 빨래를 했다. 얼른 널면 햇빛에 빨래도 금방 다 마를 듯했다. 방에 작은 발코니가 있어 좋았다. 빨랫줄을 얼른 설치해 건조 자리를 선점했다.


에잇, 마트에서 맥주를 사 왔다. 광장의 벤치에 앉아 여유로이 한 캔을 마셨다. 침대 누워 휴식도 취했다. 충분히 쉬다 저녁 무렵엔 골목 산책을 나섰다. 미로 같은 골목들이 마치 놀이 같았다. 다리를 건너 에스테야의 멋진 절벽도 만났다. 성당과 미술관은 그냥 밖에서만 구경했다. 광장엔 아이들이 정신없을 정도로 많았다. 여기 도대체 몇 개의 축구 경기가 벌이지고 있는 걸까. 하긴 스페인인데, 아이들의 장난에

축구공이 빠질 리가 없지.

<오늘의 거점, Estella>

첫날 생장 사무실 앞에서 만났던 한국인 어르신을 여기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하물며 같은 숙소였다. 부끄럽게도 아까 샤워를 하다 딱 마주쳤더랬다. 많이 사 오셨다며 닭고기를 선뜻 나눠주셔, 그걸로 점심을 대신했다. 저녁 즈음엔 맥주를 나눠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까지 나눴다. 자리가 더 길어져 아래층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잔을 더 마셨다. 점심도 저녁 술도, 어쩌다 모두 빚을 졌다.


벌써 아홉 시가 넘었다. 만약일 다음을 기약하며 우린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바깥엔 아이들의 소리가 여전히 활기찼다. 스페인도 불금은 불금인가 보다. 하루가 이렇게 후다닥 끝이 났다. 밤이 오고, 새벽은 기다린다.


내일은 숙소를 따로 예약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종종 예약 없이도 다녀볼까 생각 중이었다. 사실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 갈지, 산솔(Sansol)까지 갈지 길의 일정도 아직 결정 못 했다. 산솔까지 간다면 약 28km의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어찌 될지 모르니 아무래도 내일은 일찍 일어나는 게 좋겠다. 모처럼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누워본다.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길은 처음이었다. 희한하게 그게 또 설렜다.



2024.10.04.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5일 차(누적거리 112.43km)

오늘 하루 41,640보(25.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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