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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빨라 되다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6일 차

by 달여리
에스테야~토레스델리오(≈29.06km)


뒤늦게 들어온 유럽 남정네들의 소란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누운 지 한참, 열두 시쯤에야 겨우 잠에 들었던가 그랬다. 다섯 시로 맞춰둔 알람이 낮은 소리로 울렸다. 핸드폰이 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였는데도 번뜩 잘도 들렸다. 루틴처럼 점점 익숙해지는 새벽의 준비였다. 침낭을 대충 말아 배낭과 나머지 짐들을 들고 일단 방에서 나갔다. 매무새는 공용 공간에서 마무리. 아침으론 남은 계란과 사과를 하나씩 먹었다. 여행을 떠난 지 어느덧 60일째였다. 유심도 세 번째로 갈아 끼웠다.


약간의 스트레칭 후 재깍 여섯 시에 길을 나섰다. 별들이 총총 박힌 하늘은 오밤중처럼 컴컴했다. 고요히 잠든 이 도시를 통과한다. 가로등이 있어 걷기가 썩 괜찮았다. 간간이 차들이 다녔다. 엊저녁 아름다웠던 에스테야의 절벽은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가 않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도 검게 소리만 들렸다. 어쩐 일인지 걷는 사람은 아직 없는 듯했다. 길 위에 혼자여서 오히려 좋았다. 대체로 적막은 걷는데 도움이 됐다.


중심가를 벗어날수록 길의 분위기가 으슥해졌다. 20분쯤 걸어 나가자, 길을 밝히던 가로등도 하나둘 사라져 갔다. 좋았던 기분이 싹 사라지고 점차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내 그림자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안 되겠다. 헤드랜턴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빛을 비추기 위해 연신 고개를 좌우로 돌려댔다. 어두우니 표식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잔뜩 핀 별만 예쁘지, 어둠은 걷는데 도움이 안 됐다. 어떤 곳을 지나고 있는지 도무지 감이 안 왔다. 길이 완전한 어둠에 잠기자 오직 동그란 헤드렌턴 빛만이 가능한 시야의 전부가 됐다. 적막해 좋은 줄만 알았는데, 아무도 없으니 외려 어둠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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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걸어 새벽으로 닿는다>

와이너리 공장과 마을을 지나고, 도로를 건너 깊숙한 길을 걷는다. 좁은 시야에 의지해 길을 걸어 나갔다. 적막의 숨소리가 오롯이 내 몫으로만 가득 찬다. 그러고 보니 이라체 수도원(Monasterio de Irache)에 있다는 무료 와인 시음대는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나 보다. 에스테야에서 3km 남짓 떨어져 있다고 했으니, 알아차렸을 땐 지나도 한참 지난 때였다. 좀 전의 그 와이너리 공장 근처지 않았을까. 어둠 속에서 그저 방향에만 집중하느라 전혀 못 봤다. 수도꼭지에서 공짜 와인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어차피 새벽엔 꼭지가 잠긴다고 했던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긴 했다.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자동차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엉뚱한 숲길로 들어 약간 헤매기도 했다. 어제부터 길 너머 먼발치로 내내 보였던 납작한 절벽은 한층 더 가까워져 있었다. 7시 반쯤이 되자 어스름이 오르기 시작했다. 점차 헤드랜턴이 없어도 길을 분간할 수 있게 됐다. 하늘이 서서히 밝게 번진다. 분홍이었다가 주홍으로, 마치 노을 같은 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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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마을을 지나는 동안 날이 밝아온다>

7시 50분, 아주 작은 Azqueta 마을을 지난다. 흙길을 걸어 포도밭도 스친다. 8시 20분, Villamayor de Monjardín이라는 긴 이름의 마을도 지난다. 한참 전부터 보였던 뾰족산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었다. 이곳에서부터 길을 출발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날이 밝고 나니 하나둘 순례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는 12km 정도가 남았다. 거기서 산솔(Sansol)까지 7km 정도를 더 걸어가 볼 요량이었다. 새벽의 어둠을 걸으며 이제 막 오늘의 목적지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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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흔적이 남겨진 이 길이 아름다웠다>

해가 비치며 땅이 깨어난다. 검은 어둠에 잠겨 한 가지 색으로 뭉뚱그려졌던 풍경은 이제야 제각각 자신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초록 나무, 적갈의 토양, 누렇고 하얀 자갈길 그리고 푸른 하늘. 신난 새들도 지저귄다. 추수가 끝난 밀밭 사잇길을 끝도 없이 걸어 나갔다.


9시 40분, 길가의 푸드트럭을 만났다. 커피 한 잔에 크로와상 한 입으로 한 타임 쉬어간다. 아유포토그래퍼? 사진기를 들고 있으니 자꾸만 그리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의의로 카메라를 든 순례자가 거의 없다.) 거짓말을 할까 말까. 노노노노, 아이저스트라이크테이킹픽처스. 커피도 풍경도 모두 달다. 바람은 없고, 공기는 아직 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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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Arcos까지>

쉬었더니 힘이 난다. 저 멀리 새로운 산 풍경도 길 위로 더해졌다. 삼십 분쯤을 더 걸어가자, 산솔까지 9.6km 남았다는 표지가 나왔다. 부지런히 발을 앞으로 내디뎌 걷는 속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부지런한 트랙터는 밭 위를 바삐 움직였다. 사각의 건초 더미가 곳곳으로 쌓여 있었다. 빛이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유독 올리브나무가 많았다. 멋들어진 구름이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잔뜩 구경하듯 걸었다. 그렇게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했다. 10시 55분이었다.


11시 종소리가 곧이어 뒤따라온다. 쉴까 말까 하다 그대로 걸어 나갔다. 산솔은 산속에 있을까. 이름이 예뻐서 더 궁금한 산솔로 힘을 내 걸음을 이었다. 구불구불 골목길의 로스 아르코스를 벗어나자, 그늘 없는 자갈길이 길게 길게 이어졌다. 반복되는 이 길이 지루했다. 길어질수록 점차 점차 지쳐갔다. 저기 저 산솔임이 분명한 마을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도무지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갑자기 시끄러운 동력 행글라이더가 머리 위로 가까이 지나가 놀랐다. 쯧쯧쯧쯧쯧, 그것도 응원이라고 풀벌레들이 힘 빠지는 울음소리를 쉼 없이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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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Arcos에서 Sansol까지>

12시 반 드디어 산솔에 도착했다. 기대처럼 산속은 아니었다. 28km가 넘는 길을 새벽부터 열심히 참 빨리도 걸어왔다. 미리 알아둔 숙소가 있었다. 10유로짜리 Albergue Karma의 벨을 눌렀더니 주인장이 1시 오픈이라 조금 기다려달라 한다. 배낭을 내려놓고 골목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기다렸다. 십 분쯤을 그리 앉아 있었을까, 기다리느니 그냥 다음 마을까지 갈까 싶었다. 그것도 고작 800m 정도만 더 걸어가면 됐다. 오케이! 나름 빠른 결정. 골목에 두었던 배낭을 다시 멨다. 그 소리가 났는지 주인장이 2층 창밖으로 고개를 내다봤다. 바이, 손 흔들어 가겠다고 표시했다. 아디오스, 그가 인사했다.


오히려 잘했다. 막상 걸어와보니 다음 마을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ío)가 더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편한 구석이 있었다. 둘은 마치 쌍둥이 마을인 듯 도로 하나를 두고 비슷한 형태로 세워져 있었다. 공립 알베르게가 없다는 건 검색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첫 번째 사립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빈 침대가 있다 한다. 얼핏, 시설도 마음에 들었다. 일층에 슈퍼를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체크인을 하며 저녁 식사도 예약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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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Tores del Rio>

아는 체를 하진 않았지만, 다른 한국 분들이 몇 계셨다. 좀 쉬다 보니 오전의 푸드트럭에서 만났던 어느 한국인 부부도 여기로 오신다. 오다가다 자주 얼굴을 본 외국분들도 하나둘 이곳으로 왔다. 어랏, 어찌 된 일인지 첫날의 시작을 함께했던 브라질 분도 여기서 다시 만났다. 마치 만남의 장소 같은 느낌이었다. 아껴둔 말과 함께 어색하고도 반가운 표정이 서로 오갔다. 긴 걸음을 걸은 오늘의 종착지로 딱이었다. 먼 걸음에도 일찍 도착하니 세상 편했다. 이른 새벽에 출발한 보람이었다. 역시 샤워와 빨래 후엔 맥주였다. 두 다리 딱 뻗고 마시는 맥주가 꿀맛이 아닐 수 없다.


알게 됐다. 아니 인정했다. 15kg의 배낭을 메고 걷는 최대치의 거리가 28km 정도라는 걸 오늘 다시 확인했다. 무엇보다 발바닥이 많이 아팠다. 무릎과 종아리, 허벅지에도 약간의 무리가 있다. 하긴 너무 빨리 걷기도 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일 더 멀리 32km 정도를 걸어 나바레테(Navarrete)까지 가볼까 고민했었는데 빠르게 포기했다. 20km 정도의 떨어진 로그로뇨(Logroño)까지만 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보편적인 7일 차 코스도 로스 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까지다. 프랑스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로그로뇨를 아깝게 그냥 지나칠 필요도 없었다. 그래, 편리한 대도시에 한 번 머물러 가자.


하루 이틀간 로그로뇨에서 빌바오(Bilbo)로의 미술관 일탈도 잠시 고민했지만, 그것도 마음을 접었다. 그보다는 부지런히 걸어 세상 끝이라는 피스테라(Fisterra)와 무시아(Muxía)까지 걸어갈 시간적 여유를 버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앞으로의 일정이 모두 미정이니, 앞선 시간을 아껴두는 게 차라리 나을 성싶었다.


동네를 잠깐 산책했다. 침대에 누워 휴식도 취했다. 밤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저녁과 곁들인 와인이 따뜻했다. 어느 독일인 형아가 추천해 준 동네 bar에서 그 독일인 형아와 같이 맥주도 한 잔 마셨다.(근데... 형아가 맞겠지?) 이 형아는 내일 나바레테까지 간단다. 똑같이 그도 오늘 에스테야에서 출발했다. 같이 가자고, 오늘보다 고작 4km만 더 가면 되는데 뭐가 힘들겠냐고 눈빛으로 꼬신다. 그는 이번이 세 번째 산티아고라 한다. 이 bar에서 찍은 3년 전과 1년 전 사진을 보여줬다. 나바레테에 아주 맛있는 레스토랑이 있단다. 귀가 팔랑팔랑. 아, 다시 고민이 된다. 음음. 어찌 될지 모르니 일단은 내일도 일찍 일어나 봐야겠다.


알람을 맞추고 아홉 시에 눈을 붙였다. 기분 좋은 취기인지 먼 길의 피곤인지,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2024.10.05.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6일 차(누적거리 141.49km)

오늘 하루 49,630보(30.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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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a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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