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4일 차
팜플로나~푸엔테라레이나(≈23.66km)
겨우 9시 반에 잠들었는데, 그만 2시간 만에 깨버리고 말았다. 그리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온갖 잡음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자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만큼 예민했었나.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됐다. 최고은, Arco, 넬... 이어폰을 꺼내 음악에 집중도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글렀다. 견디다 못해 결국 3시쯤 주방으로 나왔다. 나처럼 잠 못 든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식탁에 앉아 푹 숙인 머리를 쥐어싸고 있는 걸 보니, 영락없었다. 동지의 눈빛 교환을 했다. 물을 데워놨다고 손짓으로 따뜻한 차 한 잔을 권유하셨다. 홍차를 타 마신다. 창 밖을 보니 이제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차라리 얼른 걷고 싶었다. 그래도 어둠 속의 긴 걸음은 부담이 됐다. 확인해 보니 일출 예정 시간이 8시 6분이다. 아무리 빨라도 7시쯤 출발하는 게 적절할 듯했다. 새벽의 시간은 너무나 느리게 흘렀다. 잠이 오긴 오는데, 잠에 들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연신 하품이 났다. 자꾸만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침을 기다리는 김에 아예 길 공부를 해둔다. 미뤘던 예습을 갑작스러운 불면 덕에 하게 됐다. 3일 동안 걸었지만 도무지 순례길에 대한 개념이 잘 안 섰다. 무엇보다 지명이 어려워 좀체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누군가 소개해준 부엔까미노앱을 이제야 설치했다. 하나 둘 내용을 천천히 확인하며, 조금씩이나 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갔다.
거기 상세루트 탭을 확인하니 34일 치의 '정규코스'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본인의 체력과 여건이 허락한다면 이 일정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가장 보편적이며 대중적인 코스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건 그저 편리한 '제안'일 뿐, 정해진 일정이란 건 따로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상황에 따라 순례길의 각 구간은 얼마든 조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올레길처럼 1코스, 2코스 하는 식으로 딱 정해진 게 아니었다. 마을마다 대체로 알베르게 하나 정도는 있기에 묵을 곳을 정하는 건 전적으로 순례자의 자유다. 하루치의 길은 결국 본인의 결정에 따른다. 어떤 이는 40km씩 20일을 걸려 완주하고, 어떤 이는 20km씩 40일을 걸려 완주한다. 더 길거나 짧게도 얼마든 가능하다. 이 부분이 도보여행으로서 순례길 여정의 핵심이었다. 결국 길은 각자 '마음먹은 데'에 달려 있다.
산티아고순례길을 알아볼 때 가장 혼란스러웠던 게 이런 구간별 일정에 관한 부분이었다.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지명을 이야기하고 있어 도무지 어떻게 일정을 잡아야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었다. 이제 와 보니 충분히 그럴만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여기 팜플로나까지 거의 '정규코스'에 맞춰 잘도 따라왔다. 가보면 알게 되겠지 했던 게, 정말 와서 알아간다.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만 해도 솔직히 론세스바예스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동안은 물어물어 다음의 일정을 정했다면, 앞으로는 스스로 계획을 짤 수 있게 됐다. 일단은 대체로 '정규 코스'를 따라가되 중간중간 돌발변수를 고려하기로 했다. 이른 새벽 아주 충실히 공부했다. 불면이 오히려 유용한 덕이 됐다.
다섯 시쯤 방으로 들어가 짐을 다 챙겨 나왔다. 스트레칭을 하고 아침을 챙겨 먹었다. 여섯 시쯤 되자 깨어난 이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일곱 시에 일등으로 숙소를 나섰다. 어둠이 당장 춥지는 않았다. 골목의 분위기는 아침이라기보다는 깊은 새벽 같았다. 텅 빈 골목을 구경하듯 걸었다. 일찍 문을 연 빵집도 보였다. 그친 줄 알고 우비를 입지 않았는데, 약간의 부슬비 느낌이 있다. 의외의 상쾌함도 틈틈이 껴있었다.
도심을 가로지른다. 스륵스륵 깨어나는 도시의 아침이 보인다. 도로와 공원을 건너 대학교도 지났다.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고, 바삐 출근하는 차들이 있었다. 평일을 여는 평범하고도 분주한 풍경이었다. 구름이 두텁게 낀 하늘은 서서히 푸른 빛깔로 물들기 시작했다. 까마귀가 깍깍, 아침을 시샘하듯 여명을 몰아세운다. 지면이 갈라서며 새 빛이 희미하게 트여 오르고 있었다.
한 시간쯤을 걸어 팜플로나를 벗어난다. 고속도로 위를 건너 복잡한 도로를 따라 나갔다. 첫 번째 마을 Cizur Menor은 자그마했다. 한창 등교 중인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골목이 들썩였다. 잔뜩 흐렸지만 분명 동이 텄다. 붉은빛이 가녀리게나마 저만치 걸려있었다. 마을을 빠져 들판으로 들어선다. 아무것도 없어 어딘지 아련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날씨 탓에 더 그랬다.
죽은 해바라기의 언덕을 지난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결국 우비를 꺼내 입었다. 밭의 능선이 유달리 예쁜 길이었다. 갈색, 초록 그리고 안개. 뒤따라오던 아이들의 행렬이 곁을 지나 길을 안내했다. 9시 35분, 오르막을 따라 두 번째 마을 Zariquiegui로 들어섰다. 작은 식료품점이 있어 간식도 살 겸 한 차례 쉬어가기 딱 좋아 보였다. 그런들 딱히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예보가 틀린 걸까. 비는 오다 말다 했다. 저기 저 언덕 너머로는 그래도 파란 하늘이 살포시 걸쳐져 있었다. 길은 대체로 오르막이었다. 이 오르막이 은근 힘이 들었다. 군데군데 넓은 진흙탕 구덩이도 있어 피해 가기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어쨌든 하는 수 없이 부지런히 올랐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멀리서부터 봤던 풍력발전소 높이까지 올라왔다. 조금 더 나아가자 그 유명한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ón)'으로 닿는다.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그래도 여기선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중세의 순례자들이 지난 삶의 죄를 고백하고 신의 자비를 구했다던 이 '용서의 언덕'은 프랑스길의 주요한 상징 거점 중 하나이다. 죄를 뒤로 남기고 새로운 삶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용서(Perdón)'는, 이 언덕을 통해 물리적으로도 실현이 된다. "오르막을 올라 고개를 넘는다." 사실상 이곳은 피레네 산맥 이후로 맞는 첫 번째 고개이기도 했다. 남기고 나아가는 용서를 통해, 비로소 순례길이 시작된다.
해발고도는 약 770m다. 주변에 풍력발전소가 많다는 건, 그만큼 바람이 크고 잦다는 뜻이다. 나바라 평야와 피레네 산맥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북쪽으로는 팜플로나 평야, 남쪽으로는 아르가 계곡이 펼쳐진 시원한 풍광을 자랑한다. 특히 1996년에 세워진 철제 순례자 조각상은 순례길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대표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그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Donde se cruza el camino del viento con el de las estrellas(바람의 길과 별의 길이 만나는 곳)”
아. 무릎을 탁 쳤다. 빗방울에도 가슴만은 후련했다. 그렇다고 딱히 용서를 되뇐 건 아니었다. 아직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할 만큼 감정적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힘껏 찌푸린 하늘, 그 보이지 않는 풍경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건 '용서'에 버금가는 수준의 너른 마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용서의 언덕을 넘어가자마자 거짓말처럼 날이 확 개기 시작했다. 가렸던 풍경이 돌연히 드넓도록 드러났다. 빛이 퍼지며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웬걸, 좋아서 웃음이 와락 터졌다.
피레네 산맥의 푸드트럭에서 만났던 한국분 중 한 분을 여기서 다시 만났다. 그동안 드문드문 길 위에서 마주치곤 했던 분이셨다. 그제야 통성명을 했다. 사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용서의 언덕을 내려왔다. Utrga와 Muruzábal, 두 개의 마을을 지날 때까지 두 시간 정도를 함께 걸었다. 어느새 먹구름은 완전히 사라지고 완연한 햇살이 가득했다. 날이 갠 건지, 아니면 날씨가 좋은 곳으로 온 건지는 역시나 알 수가 없었다. Muruzábal 마을의 한 벤치에서 그 분과는 헤어졌다. 아무래도 혼자 걷고 싶었다. 쉬었다 가겠노라 말씀드리고 가시는 길을 인사로 배웅했다. 언제고 우연히 또 만나자고 했다.
아무렴 공기가 불현듯 여름날 같았다. 하늘이 높고 또 파랬다. 햇살은 따갑고, 그늘은 시원했다.
한적한 길을 건너 다음 마을이 이어졌다. 종착지 전 마지막 마을인 Obanos는 더없이 한가롭고 나긋했다. 모든 면에 반사된 빛이 만연하다. 그림자는 짙고, 햇빛은 고요했다. 작지만 상징적인 곳이었다. 속죄와 용서를 의미하는 '오바노스 왕자의 전설(La leyenda del Príncipe de Obanos)'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용서의 언덕을 지난 길이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연결된다. 언덕에 내려놓았을 여느 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곳이었다.
그 전설이란 대략 이러했다. '순례를 마친 뒤 종교적 감동을 느낀 여동생이 속세를 떠나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자, 왕자는 분노에 휩싸여 그녀를 죽이기에 이르렀다. 곧 깊은 죄책감에 빠지게 된 왕자는 자신에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위해 Obanos에서 남은 생을 모두 속죄와 봉사의 삶으로만 채워나갔다.'는 이야기였다. 후에 그는 성인으로까지 추앙으로 받게 된다. 이 전설은 현재까지도 종교극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고 한다.
산 후안 바우티스타 성당(Iglesia de San Juan Bautista) 앞에 놓인 가녀린 십자가 상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정식 명칭은 없지만 이름하야 '오바노스의 그리스도(El Cristo de Obanos)'라 불리는 철제 조각이었다. 예수의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로 얇게 묘사되어 있었다. 파란 하늘에 대비되어 묘할 정도로 그 모습이 강렬했다.
천천히 마을을 벗어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오늘의 종착지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다. 불쑥 솟은 성당의 탑이 이방의 순례자를 먼저 맞이해 주었다. 지나는 김에 안으로 들어가 어설픈 인사까지 드리고 나왔다. 예약한 숙소는 금방이었다. 1시 정각에 정확히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고 샤워와 빨래까지 마치니, 만사가 형통한 기분이 들었다. 키아! 햇살이 만연한 베란다에 빨래를 널며 자판기표 산미구엘 캔맥주를 마셨다. 마침 개천절이라 휴일인 한국과도 두런두런 여유로운 통화를 했다. 두 발 뻗어 일광욕을 시도했다. 하지만 빛이 뜨거워 오래 즐길 순 없었다.
느릿느릿 마을 구경을 했다. 구석구석 골목이 아늑했다. 파프리카가 이곳의 특산물인지, 매콤한 냄새를 풍기는 작은 시장이 마을 끝자락에 붙어있었다. 한쪽에선 연신 파프리카를 굽는다. 그 맛이 궁금했다. 한 봉지 사볼까 하다, 이내 그 궁금증을 접었다. 다 먹지도 못하고 짐만 될 것 같았다. 강가에도 나가보고 다리도 건너본다. 알고 보니 마을 이름인 '푸엔테 라 레이나'는 '왕비의 다리'라는 뜻이었다. 아르가 강을 힘들게 건너가는 순례자들을 위해 나바라 왕국의 여왕이 다리를 세웠다는 데서 이 마을의 이름의 연유했다. 11세기에 세워졌다는 석조 다리는 여전히 건실해 보였다. 지나온 천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넜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 다리를 건너는 순례 행위를 “세속에서 신앙으로, 과거에서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통과의례”라 소개한 문구를 어디선가 봤었다. 용서를 지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오늘 순례길의 테마가, '용서의 언덕'을 넘고 '속죄의 마을'을 지나 여기 이 '왕비의 다리'에서 완성이 되는 셈이었다. 과거가 끝나고 새로이 맞이할 현재. 어찌 내일부터는 완전히 다른 길이 펼쳐지려나 모르겠다. 아래로 흐르는 강은 마치 멈춘 듯 느렸다. 마침 햇살마저 문드러져 문득 상념에 젖기 딱 좋은 분위기로 이어졌다.
마트에서 대충 장을 봐와 저녁을 차려 먹었다. 계란도 여섯 개나 삶아뒀다. 내일 점심까지 아주 든든할 듯했다. 공용 주방에서 이런저런 할 일들을 하며 긴 시간을 보냈다. 어라, 첫날의 대만 분을 여기서 또 만났다. 그녀도 이 숙소에 묵으신단다.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눴다. 다행이랄지, 그사이 주변에 친구가 잔뜩 생기신 듯 보였다.
해 질 녘 다시 강가로 걸어가 하늘을 구경했다. 분홍의 석양은 아름다우나, 그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봤다. 왠지 낮보다는 조금 빨라진 것 같았다. 하늘은 금방 어두워졌다. 밤은 내일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품이 쩍쩍 쏟아졌다. 밀린 잠을 잘 때가 되었다. 오늘을 부디 푹 잘 수 있겠지. 기대를 품고 일치감치 잠자리에 누웠다.
2024.10.03.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4일 차(누적거리 90.44km)
오늘 하루 45,031보(28.2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a」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