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는 없고 경유지는 많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라 믿는다. 솔직히 그렇지 않나. 어렸을 때부터 원하는 진로가 매우 확고한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그럴 것이다. 진로 고민은 끝이 없고 방황은 성인 10년 차에도 계속된다. 몇 번의 진로 고민과 설계와 철거와 변경과 수정과 도전과 실패를 겪고 난 인생 30년 차 청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제 와서 세어 보니 지금까지 총 열 번의 진로 변경이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걸 물어보길 좋아한다. 장래희망이 뭐야? 꿈이 뭐야?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가장 첫 번째 대답은 선생님이었고, 그 후로도 꽤나 오랫동안 같은 대답이었다. 뭔가 가르치는 것이 좋거나 적성에 맞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가장 많이 마주하고 잘 아는 직업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유야 별거 없어도 내 대답에 주변 어른들은 만족해했고 나도 딱히 그것을 엎을 만큼 매력적인 직업을 발견하지 못해 당분간 그 대답은 유지되었다.
두 번째 대답은 작가였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이나 5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생에 최초로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 어른들이 그다지 좋아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작가는 돈을 잘 못 번다. 작가는 별로다. 그런 인식을 내게 충분히 심어준 결과 금방 그 대답을 철회했다. 책을 좋아하고 취미로 소설을 써서 반 친구들 대상으로 공책연재하던 어린이에게도 제 꿈에 의심을 갖게 할 만큼의 인식이었다. 글은 작가가 아니어도 쓸 수 있어. 취미로도 할 수 있어. 글을 쓰면 돈을 잘 못 벌어. 이런 말들은 금방 다시 듣게 된다.
세 번째 대답은 뮤지션이었다. 그 꿈은 점점 세분화되어 뮤지션에서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주변 어른들, 특히 가까운 어른일수록 이 대답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초등학생이 아니었던 나는 부정적인 말들을 들을수록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음악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음악을 하면 돈을 못 번다. 음악으로 성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맞는 말이겠지만 사춘기 소녀에게는 오히려 장작을 넣어주는 셈이었다. 작고 소중한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저렴한 일렉기타와 엠프를 사고 서점에서 기타 책을 사서 보며 독학했다. 집에 프린트가 없어서 연습장에 줄을 여섯 개 그려 타브악보를 그렸다. 화성학이고 이론이고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고 내 맘대로 코드진행을 배열하고 멜로디를 나열하고 가사를 붙여서 엉터리 작곡도 많이 했다. 우리 집 어느 상자에 그런 노트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당연히 학원은 한 번도 다니지 못했다.
꽤나 오랫동안 대답은 내내 기타리스트고 뮤지션이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 진학을 위해 무언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그런 시기가 다가올수록 부모님은 더욱 격렬하게 반대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단념한 채 고등학생이 된 나는 다른 장래희망을 찾아봐야겠다 생각하고 아무 장래희망 없이 몇 달을 살았다. 그리고 그 몇 달의 휘청거림이 너무 무섭고 어려웠다. 어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무언가를 말하면 초를 치는 경향이 있다. 생각하고 생각해서 내가 음악 다음으로 좋아하는 건 영화겠지 생각하고 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잠시 지망했다가 철회했다. 철회했던 이유에는 기타리스트와 다를 것 없는 부정적 반응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없어서였다.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걸 직업으로 할 만큼인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지만 끝맺지 못하고 영화 시나리오 작가라는 대답은 철회했다. 그리고 기타리스트라는 대답을 철회했던 것을 다시 철회했다. 부모님께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눈물의 편지를 썼다. 나는 정말 음악을 해야겠고 그래야 내가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내용인데 어쩌겠어. 어려운 살림에 고등학교 2학년인 나는 처음으로 실용음악학원에 간다. 그래서 네 번째 대답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였고, 다섯 번째 대답은 다시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재수 1년 약 3년간 레슨을 받고 꿈꾸던 실용음악과에 입학하게 된다. 레슨을 거치며 여섯 번째 대답은 재즈기타리스트로 다시 구체화되었다. 이런저런 장르들을 익히면서 재즈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문장으로 입학했다고만 썼지만 그 과정에는 눈물로 얼룩진 과정들이 있었다. 대학 가면 이제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로 과정들을 버텨왔으나 큰 착각이었다. 다른 학교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다녔던 학교의 커리큘럼은 다양한 장르를 배우게끔 했고, 사실 그것이 맞는 교육이라 생각은 하지만 그 당시엔 내가 이 고생을 하고 학교에 왔는데도 여전히 하고 싶지 않은 음악을 해야 한다는 괴로움에 몸서리쳤다. 실용음악과에서도 재즈는 메이저 한 장르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정통 재즈는 마이너 한 편이고, 기타는 재즈에서 필수인 악기가 아닌 데다가 피아노보다 덜 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개척해 나가야 할 일이 삼만리였다.
일곱 번째 대답을 잃었다. 재즈는 돈이 안 된다. 음악이 돈이 안 된다라는 문장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음악 중에서도 재즈만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좌절했다. 연습을 게을리했다. 여전히 괴롭게 연습해서 안되던 것을 해낼 때의 순간을 사랑하지만 그 순간의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컸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라 학비는 전혀 지원받을 수 없었다. 한 학기에 500만 원이 들었다. 장학금을 전혀 못 받는다고 치면 학자금 대출이 최대 4천만 원이 쌓일 예정이었다. 어떻게 갚지? 학원강사를 하면서 4천만 원을 벌려면 얼마나 일을 해야 하지? 학원강사는 프리랜서인데 갑자기 잘리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학자금 대출도 갚으면서 생활비도 댈 수 있나? 내가 우리 집의 유일한 4년제 대졸인데. 내가 망하는 게 나만 망하는 게 아닌데. 근데 내가 학원강사 하려고 음악을 시작했었나?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어둠에 처박힌 시절이 있었다. 2학년이 끝나고 일단 휴학했다. 이유는 여러 개 있었다. 친했던 동기는 군대를 가고, 나는 학교생활이 힘들어서 조금 쉬고 싶고, 쉬는 동안 기타 연습도 더 해봐야지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냥 도망치고 싶던 것 같기도 하다.
휴학하고 연습할 거란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다. 기타와 멀어지니 숨이 쉬어지고 기타가 아닌 다른 것들도 재밌었다. 하루 종일 음악과 기타에만 미쳐서 살아가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압박받는 생활에 지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어영부영 놀고먹는 휴학생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애지중지 사랑하던 햄스터의 죽음을 맞이한다. 햄스터의 수명은 원래가 2년 정도니 원래의 수명보다 조금 더 살다 간 것이었지만 타지에서 혼자 살면서 가장 의지했던 작은 생명체여서, 이렇게 갑자기 이별할 줄은 몰랐다. 많이 울고 슬퍼했다. 그보다 더 큰 충격은 무엇이든 끝은 있는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회피해 오다가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와의 이별을 계기로 음악과도 이별하기로 결정했다. 기타 없이는 살 수 없던, 똑같은 부분을 수백 번 반복해서 연습해도 행복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는 음악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보다 괴로움이 클 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계속 함께할 이유가 있을까.
여덟 번째는 항공교통관제사였다. 음악과 이별하기로 하고 오랜만에 텅 빈 장래희망을 가진 상태로 그냥 살고 있었다. 그러다 정말 뜬금없이 항공교통관제사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 뜬금없이 그 직업을 하고 싶었다. 그게 안되더라도 항공 관련 직업을 아무튼 갖고 싶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비행기가 마을버스처럼 짧은 배차로 지나가는 동네에 살면서 비행기를 항상 좋아했지만 항공 관련 직업은 감히 꿈꿀 수 없다고 느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 왜였을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항공교통학과를 졸업하고 관제사 면장을 취득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를 위해 선택한 경로는 편입이었다. 마침 2년까지 다닌 상태였으니 일반편입 대상자가 될 수 있었다.
휴학 1년을 연장했다. 1년 동안 편입시험 준비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 없지만 그나마 다행히도 편입시험은 영어 한 과목만 시험을 보면 되었고, 고등학교 시절 영어만을 그나마 공부했었던 과거가 있었다. 약 10개월간 강남에 있는 편입학원으로 왕복 세 시간을 통학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5시 30분에 버스를 타고 오전에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공부를 하고 밤 10시에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11시 30분쯤. 그런 생활을 계속했다. 지난 세월 남들만큼 하지 않은 공부를 응축해서 하는 엑기스 공부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점수가 나오지 않아 막막한 날도 많았고 오늘 잘해도 시험날 망하면 망하는 것이므로 불투명한 미래로 향하는 게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과는 달리 문제에는 정해진 답이 있다는 사실, 절대 실패하여 이전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 혹시라도 망하면 그냥 죽지 뭐 하는 대책 없는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냈다.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심정으로 원서를 쓸 수 있는 서울의 거의 모든 대학교와 수도권의 일부 대학교에 지원했다. 돈과 시간과 정신이 많이 소요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편입 합격에는 성공했지만, 목표로 했던 항공대는 갈 수 없었다. 최종합격한 여섯 개의 학교 중에 그나마 가장 학교 순위가 높은 곳으로 가기로 했다. 실용음악과 입시를 했던 시절에는 몰랐던 서연고서성한... 을 내가 줄줄 욀 수 있게 된 결과였다. 아무튼 문과는 간판이라니까. 그런가 하고 결정했다.
새로운 학교에서는 법학부 사법학전공으로 공부했다. 고등학교 때 사탐으로, 전적대에서 교양으로 법학 수업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전공으로서의 법은 처음이었다. 전공서적에는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용어들과 한자들이 난무했다. 이런 공부는 처음 해봐서 조금 헤맸지만 그렇다고 적성에 절대 안 맞아서 못하겠다 싶지는 않았다. 법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해서 나를 괴롭게 할 위험도 없었다. 그 정도로 사랑하거나 갈망하던 분야도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법학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법이 무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면 의아해하는 반응이 대부분인데, 내가 말하는 무난함이란 다방면에서 그렇단 뜻이다. 나의 선호도에서, 취업시장에서, 세간의 인식에서, 공부의 난이도에서. 특별히 좋을 것도 없지만 딱히 나쁠 것도 없는. 그리고 당연히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하면 또 절대 못할 건 아닌 난이도의 공부. 그런 의미에서 법학전공은 나에게 적합한 선택이었다.
편입 후 아홉 번째 대답은 공무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직 출입국관리직 공무원. 공무원을 선택한 이유는 취업보다는 시험이 더 가까운 길로 느껴졌기 때문이고, 출입국관리직을 선택한 이유는 여전히 공항이나 항공분야나 외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재미로 들었던 동아리에서 집행부를 맡게 되면서 계획이 조금 미뤄지고 타이트해지긴 했지만, 아무튼 계획대로 한 학기를 남겨두고 휴학한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이번엔 학원이 아닌 인강으로. 인강은 대학생 할인이 되는 가성비 패스로. 스터디 카페와 집을 왔다 갔다 하고 순공시간에 집착하며 공부했다. 생각보다 한국사 점수가 안 나와서 고생했고, 국제법 범위가 너무 넓어서 고생했지만 다행히도 영어는 편입준비 시절 많이 해둔 덕분에 거의 공부하지 않아도 점수가 괜찮게 나왔고, 국제법을 공부하는 것은 어렵지만 즐거웠다. 변수는 코로나였다. 이전까지 백 명 단위로 뽑던 것이 그 해에는 열명대로 줄었다. 시험을 기깔나게 잘 보는 수밖에 없었지만 아쉽게도 불합격했다. 단기로 공부한 것 치고는 선방한 점수였지만 붙을 점수는 아니었다.
열 번째 대답은 다시 공무원일 뻔했다. 왜냐면 국가직에 이어서 몇 달 뒤 지방직 시험이 있으므로. 보통 나와 같은 경우에는 행정학만 추가로 공부하여 지방직 일반행정직렬을 지원한다. 나도 그렇게 지원은 해두었으나 도통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행정학엔 흥미가 없었고 일반행정 직렬은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는 거라면 굳이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더불어 공무원 시험에는 나이제한도 없어서 40살에도 시험 볼 수 있는데 굳이 지금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시험은 접고 취직을 하기로 한다.
그래서 열 번째 대답은 회사원이었다. 처음엔 어떤 직무가 있는 지도 잘 몰랐고, 그래서 어떤 직무로 지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은 멀쩡하고 어엿한 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버는 것. 그래서 공고를 읽으면서 내가 넣을 수 있는 직무라면 전부 지원했다. 일단 법학전공이니까 법무 직무 넣고, 컴플라이언스, 준법 경영, 윤리 경영... 아무튼 법과 관련이 있다 싶으면 어떻게든 엮어서 지원했다. 그리고 노동법을 재밌게 공부했으니까 그걸 엮어서 인사직무에 지원해 보고. 오케스트라 동아리를 비롯하여 클래식 음악 관련 대외활동을 취미삼아 해두었으니 음악 관련 업무에도 지원해 보고. 그냥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므로 이 중에 어느 것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그냥 그중에 돈을 가장 많이 주는 곳에 합격하길 바랐을 뿐이다.
결국은 바라는 대로 회사원이 되었다. 노무직무였고, 계약직이었지만 그래도 멀쩡하고 어엿한 회사였다. 사실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히 뭐 하는 회사인지도 들어가서 알았다. 알아가며 일했다. 다행히도 대부분 좋은 동료들이어서 일이 조금 고되거나 가끔 잡도리를 당하더라도 관두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1년이 조금 넘는 짧은 재직 기간 중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람 때문에 힘들기도 했고 일 때문에 힘들기도 했고 출퇴근이 멀어서 힘들기도 했다. 그중 가장 스트레스받던 것은 내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회사에 열 시간 정도를 바치고 출퇴근 시간에 네 시간 정도를 바치면 내게 남는 시간은 열 시간뿐이었다. 열 시간 동안 나는 저녁도 먹고 씻고 잠도 자고 휴식도 취하고 취미생활도 해야 했다. 마치 고등학교 때 학교에 갇힌 기분이 재현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돈을 주니 참고 다녀야 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점점 죽어간다는 생각이 들었고 망가지고 있구나 병들어가는구나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병이 들어 수술을 하기도 했다. 다들 회사생활을 어떻게 몇십 년씩이나 버티며 살아가는 걸까. 사실 나만 이렇게 유별나서 힘들어하는 거고 적응 못하고 사는 나만 이상한 사람인 걸까 그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회사생활과는 별개로 업무만을 보자면, 노무업무는 대체로 할 만했고 가끔은 힘들었고 가끔은 재밌었다. 한 친구가 그랬다. 정말 너무 하기 싫고 안 맞는다 생각이 안 든다면 그 업무가 어느 정도는 적성에 맞는 거라고. 대체로 할 만한 부분은 대부분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일이었다. 노사협력팀의 막내라면 이 회사가 아니라도 누구나 할 일. 내가 아니어도 누구나 이 자리에서 바로 할 수 있을 일. 예를 들면 회의나 교섭, 노사협의회를 준비하거나 공지하는 일과, 공문을 수신하고 접수하는 일, 속기록을 치고 회의록을 쓰는 일이다. 힘들었던 부분 중 하나는 노동조합과의 술자리였다. 팀장님의 배려로 그런 자리에 거의 가지 않았지만, 가끔 가게 되는 날이면 술 취한 아저씨들을 상대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노동조합 아저씨들 앞에서는 항상 말을 골라서 해야 하고, 대우하면서도 사측으로서 너무 저자세는 아닌 느낌으로 대해야 했다. 나보다는 상사들이 대했지만 그들을 보면서 내가 그들의 연차가 되면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자신 있게 그렇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재밌다고 느낀 부분은 내가 배웠던 노동법이 적용되고 활용되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때였다. 대관업무는 어렵고 귀찮았지만 사실은 재밌기도 했고, 노동조합의 단체협약 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방어 논리를 찾는 것은 정말 재밌었다. 단체협약을 마무리 짓고 퇴사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지금도 실업급여를 받으며 여전히 진로 고민을 하고 있다. 어느 날에는 노무사를 고민했다. 되고 싶은 이유는 내가 노동법을 활용해서 방어 논리나 반박 논리 찾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 다닐 때도 그런 부분을 가장 재밌어했는데 친구들이 가끔 노무 관련 상담을 요청할 때 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니면서 즐겁게 판례와 행정해석을 찾고 알려주는 것이 재밌었다. 노동조합을 대하는 것보다는 이런 부분이 내 적성에는 맞았다. 망설이는 이유는 노무사가 되기 위한 노력과 시간과 돈에 비해 얻는 것이 더 큰 게 맞나 하는 가성비를 따지는 마음도 있었고, 전업으로 수험공부를 시작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혹시 실패할 경우에는 1년 경력을 가지고 재취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걱정이야 하려면 끝도 없고 하지 못하는 이유도 대려면 끝도 없이 댈 수 있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재밌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 이유가 이 모든 것을 이길 정도로 클까? 그것에 대한 고민도 있다.
그래서 열한 번째 대답으로는 노무사가 될 수 없겠지만, 여전히 회사원이 되어야겠지만 이 고민이 끝나지 않는다면 언젠가 다시 시험공부를 하고 있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도 있다. 또 동시에 열한 번째 대답으로 작가를 다시 말하고 싶다. 글 쓰는 것이 아직도 재밌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직업을 하나만 가져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리고 꼭 장래희망이 직업이어야 할 필요도 없지 않나.
엄마에게 진로고민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거냐고 몇 살까지 해야 하냐고 물었다. 엄마는 50살이 넘어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기대수명이 100살이 넘는 시대에 50살은 이제 고작 절반 왔을 뿐이다. 살아온 인생의 세배 이상의 시간이 남은 나에게는 앞으로도 몇 번의 진로 변경과 고민과 좌절과 실패와 성취와 성공과 철회가 있을까? 인생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기도 하고 휘청휘청 걷는 것 같기도 하다가 멀리 돌아서 원점에 도착했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소수의 대단히 확고한 사람들 말고는 우리처럼 휘청거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사실 대단히 확고한 그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는 변경과 철회와 수정과 도전을 매 순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내 진로의 목적지는 모른다. 지금은 이걸 좋아하지만 언젠가는 저걸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지금 좋아하는 이것은 싫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지금 싫어하는 저걸 나중에 다시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열 번의 경유지를 거쳐 여기에 이르렀으나 앞으로도 몇 번의 경유지가 남았는지 알 수 없다. 모르긴 몰라도 경유할 곳이 아주 많이 남았음은 알겠다. 그냥 거쳐가는 모든 곳이 경유지겠거니 생각하고 지금 향하는 곳으로 힘껏 향해 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