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 중독

귀하의 소중한 경험과 역량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채용 인원으로 인해

by 달현

불합격도 중독된다. 메일의 서두만 보아도 이 메일의 전체 내용을 알 수 있다. 고맙지만 너의 자리는 없다는 뜻이다. 그 시기를 지나면 메일의 제목만 보아도 불합격 메일로 보인다. 불합격 중독 증상이다. 무언가에 합격해 본 것이 까마득한 전생의 일로 느껴지고 제한된 채용 인원으로 인해 불합격하는 결말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 반복되는 불합격은 중독되고, 전형 결과 메일을 열어보기 전 언제나 불합격을 떠올린다.


불합격이 누적되면 초기에는 마음이 아프다. 운명처럼 이 회사에 입사할 줄 알았는데. 요즘 취업 힘들다 힘들다 해도 나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게 내 얘기구나. 충격과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중기에 들어서면 불합격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로 느껴진다. 마치 1 더하기 1이 2인 것처럼 절대적인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중기를 넘어 말기로 향하는 시점에는 불합격이 아닐까 봐 두려워진다. 혹시 합격하면 어떡하지? 이쯤 되면 합격하기 위해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불합격하기 위해 지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취준생은 자연스럽게 불합격 중독의 길로 빠지게 된다.


취업시장이 어렵다고 여기저기서 쑥덕댄다. 뉴스에서도, 현실에서도. 학교나 직장이나 친구들끼리도. 직접 불합격되기 전까지는 남의 이야기다. 구직자 10명당 일자리는 3개라던데. 나는 세 명중 한 명일까? 일곱 명중 한 명일까? 떨어지기 전까지는 세 명 중 한 명이었고, 불합격에 스며들면서 일곱 명 중 한 명이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불합격 중독자는 무기력증에 빠지기 쉽다. 난 어차피 안 될 텐데. 난 어차피 불합격일 텐데. 어차피 떨어질 것을 왜 지원해야 하지? 왜 내가 이걸 700자나 써야 하지? 왜 내가 성취의 경험을 써야 하지? 내 인생은 미성취로 가득한데. 이 정도 단계가 되면 생존에 자신이 없어진다. 생존 자격조차 불합격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 허무와 절망으로 물들어가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역설적으로 무기력증을 이겨내는 것은 불합격에 중독되는 것이다. 불합격하기 위해 지원한다는 생각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어딘가에 지원서를 내미는 것이다. 불합격할 것을 예감하면서도 지원서를 쓰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냥 한 번 해본다는 심정으로, 그냥 당연한 행동이니 한다는 느낌으로 무신경하게 해야 했다. 길거리에서 홍보 전단지를 나눠주듯이. 여기요, 이거는 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인데요, 심심하면 한 번 보시던가요. 싫으면 버리시던가요.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채용 지원의 목표가 합격이 아니라 불합격이라고 느끼는 그 자조적인 감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실제로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다. 거절의 경험은 채용 전형에서도 아프다. 아프더라도 해학의 자세로 넘기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불합격하고 싶어서 지원한 거야.


구직자 10명당 일자리가 3개라니. 구직자 입장에서 분석해 보자면 그 일자리 3개 중 오직 1개만이 우리가 가고 싶어 하는 회사일 것이라고 느낀다. 비교적 숨통 트이게 급여를 준다거나, 어디선가 이름을 들어본 것 같은 기업이라거나. 혹은 그렇지 않아도 야간 연장수당을 주고, 노동법을 지킨다거나. 나머지 2개의 일자리는 숨만 쉬고 살아도 여유 없이 살 만큼 돈을 주거나, 각종 노동법을 스리슬쩍 피해 가거나 대놓고 피해 가는 회사인 것 같다. 그러니 우리는 사실상 1개의 일자리로 경쟁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견디지 못하면 나머지 2개의 일자리를 떠밀리듯 선택하고. (선택이 맞을까?) 떠밀려 선택할 기회도 없는 나와 같은 7명은 오늘도 불합격에 중독되는 중인 것이다.


불합격에 중독된 채로 무기력증을 멀리 하며 살기는 쉽지 않다. 나의 해결책은 '다른 곳에서 합격하기'였다. 채용이 아니라 달성할 만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자격증. 그치만 너무 어려운 자격증은 안된다. 적당히 공부하고 제법 애쓰면 얻을 수 있는 무언가여야 한다. 취업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이라면 윈윈이겠지만 굳이 아니어도 오랜만에 보는 합격은 달달하다. 혹은 스스로가 만든 작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대신해 볼 수도 있다. 매일 7시에 일어나기. 주에 2번은 운동하기. 매일 책 읽기. 일주일에 한 번은 블로그에 일기를 쓰기. 삼시세끼 밥 잘 챙겨 먹기. 11시 반 전에 잠들기. 사나흘에 한 번 자전거 타기. 작은 성취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이런 시간이 쌓이면 제법 큰 성취가 된다. 그래도 나는 지난 100주 동안 매주 블로그에 일기를 썼어. 그래도 나는 올해에 책을 30권이나 읽었어. 내가 채용은 또 불합격했지만 그거 빼곤 다 해냈어. 채용은 불합격이지만 인간은 합격이다! ...그런 식의 일종의 최면이다.


불합격에 중독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다. 나도 합격을 상상하고 모든 회사가 날 원했으면 좋겠고, 나는 그중에서 고르고 골라서 입사하길 바란다. 여기는 급여가 어떻고 저기는 워라밸이 어떻고 하나하나 다 재고 따지면서 재보는 입장이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는 첫 취준 때 불합격에 확실히 중독되었고, 두 번째 취준 중인 지금도 불합격에 중독되어 감을 느낀다. 불합격이 너무나도 당연해서 채용전형 결과 메일의 내용이 궁금해지지 않는다. 첫 취준 때는 경력이 없어서 그런가 봐,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봐 하며 탓을 했지만 이번 취준에서는 그래도 무경력이 아닌데 하는 생각에 지난 1년 간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돈만 받고 다닌 걸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무기력증으로 가는 과정이다. 이 결과의 원인을 나에게 찾는다. 과거를 갑자기 돌이켜본다. 현재 무언가를 해 낼 기운이 사그라진다.


지금으로선 차라리 불합격에 중독되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불합격이지만 그래도 계속해 봐야지. 첫 취업 때는 158번을 지원한 결과 어느 계약직 자리에 합격하여 입사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몇 번의 지원 끝에 합격할 수 있을까? 불합격에 너무 깊이 중독되기 전이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30년째 진로 고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