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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교 Sep 18. 2022

술 마시기 좋은 날

기분 좋은 날은 좋아서, 더운 날은 더워서,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와서, 스트레스에 찌든 날은 또 그래서 당긴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이상할 게 없는 당위로 무장하고 오늘은 어떤 걸 고르겠느냐고 묻는다. 타고난 정체성을 숨기고 절반 이상을 다른 것으로 채운 김치냉장고 앞에서 나는 오늘도 고민한다. 타이거냐, 칭다오냐, 곰표냐, 테라냐, 아니면 코젤 다크냐.



여러 선택지를 두고 골몰하는 이 순간. 가진 자의 여유가 이런 것일까, 어렴풋이 짐작해보곤 한다. 술 마시기 좋은 날? 그런 건 없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던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가벼운 술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이, 그냥 좋다. 쨍한 시원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동시에 다리가 살짝 풀리는 이 한 모금에 오늘이 녹아내린다.

 


사회에 발을 내딛으면서 진정한 음주인의 세계에 들어섰다. 아, 대학 시절에도 마시긴 했다. 술 자체를 즐겼다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게 도와주는 관계의 윤활제로서 술이 좋았다. 사람이 좋았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좋았고, 그들과 주고받는 술잔이 늘수록 사이가 돈독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마다하지 않았다. ‘진정한’ 음주인으로 거듭난 기점을 사회생활로 잡은 건, 소맥의 맛에 눈떴기 때문이다. 선배들이 사사한 황금 비율의 소맥은 대학생 때 마구 섞어 마시던 소맥과는 달랐다. 알맞은 탄산과 적당한 쓴맛, 끊어 마시지 않아도 되는 목 넘김까지…. 곁들이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친화력은 또 어떻고.

 


전수한 소맥의 황금 비율은 이렇다. 먼저 맥주잔과 눈높이를 맞춘다. 소주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정확하게 노려보기 위함이다. 소주는 맥주잔 바닥에서 8㎜ 정도(정확한 비율을 위해 자를 들고 측정해봤다). 맥주는 맥주잔에 쓰인 Cass의 C에 닿을락 말락 하는 순간 멈춘다. 한 번에 털어 넣기에 딱 적당한 양이다. 맥주잔의 입구 끝을 가볍게 잡고 손목 스냅을 이용해 재빨리 빙글빙글 돌리면서 두 가지 술을 잘 섞는다. 다년간의 소맥 제조 경험에 따르면, 빠른 속도로 맥주를 부으면 거품이 올라오면서 술이 저절로 섞인다. 술을 마시기 전 퍼포먼스가 필요한 게 아니라면 빙글빙글 돌리는 과정은 생략한다. 소맥용 소주와 맥주는 무조건 시원해야 한다. 그래야 첫 잔을 들이켰을 때 크~ 감탄사가 나온다.

 


소주는 술잔이 대여섯 순배 돌고 나면 각자 따라 마셔도 어색하지 않다. 맥주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무르익다 보면 빈 잔을 놓치기도 하니까, 목마른 사람이 따르고 마시면 된다. 종종 비어있는 잔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사람도 있는데, 꼰대라고 불리기 딱 좋다. 개인위생이 더욱 중요해지면서 각자 한 병씩 차고앉아 알아서 마시는 사람도 있다는데 뭘.

 


소맥은 다정했다. 이상하게도 다 같이 소맥을 마실 때는 일사불란하게 팀플레이를 하게 된다. 둘러앉은 사람들의 잔이 다 비워지기까지 기다렸다가 병권을 잡은 이가 빈 잔을 수거해 둘러앉은 위치 그대로 잔을 세운다. 줄 맞춰 서 있는 잔을 오가며 술이 채워지는 순간, 십여 개의 눈이 반짝 빛난다. 술이 고파서 다른 이들과 속도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혼자 잔을 채우게 두지 않는다. 초록색 병과 갈색 병을 바꿔가면서 스스로 잔을 채우는 장면을 연출하게 그냥 보고 있지 않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서로 내가 채워주마, 병을 뺏어 든다. 이토록 살뜰한 챙김을 당하고 있자면, 소맥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크고 작은 관계의 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았는데, 갈수록 희미해지기만 했던 나 자신을 마주하고 쉼 없이 흔들렸던 서른을 앞둔 어느 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광화문 밤거리로 뛰어나가 허한 속을 소맥으로 채우고 다음 날 비워내는 일이었다. 소맥은 새로고침이었다. 저녁이면 채우고 아침이면 또 비우고. 괴로웠지만 후련했다. 하루하루 쌓이기만 했던 답답함을 그렇게나마 게워낸 덕분에 버틸 수 있는 나날이었다. 꽤 여러 날을 그렇게 위로받았다.



지금도 그 시절을 함께 통과한 동료들과 만나면 첫 잔은 무조건 소맥이다. 소맥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치열했던 우리의 그때로 돌아가곤 한다. 그때의 상처에 딱지가 지고 새 살이 솟아올라 조금 더 단단한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이쯤 되면 소맥 예찬이라고 제목을 바꿔야 하나 싶지만,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나의 음주 라이프는 변화를 맞는다. 숙취와 다르지 않은 입덧 증상에 시달리다 다시 경험하기 싫은 것 중 하나로 숙취가 이름을 올렸고, 체력이 생생하던 소싯적만 생각하면서 소맥을 양껏 먹다가 된통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외쳤다. 더는 이런 꼴로 살지 말아야겠다는 자기반성에서 비롯한 외침을. ‘내가 또 이걸 이렇게 먹으면 사람이 아니다!’ … 지금 나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술을 마시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마실 거다,라고 쓰기에는 양심이 견딜 수가 없어서 가능한 한 완곡한 표현을 골랐다) 단번에 끊어내기에는 추억이 많다. 굳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내외할 수 있는 사이였다면 진작 멀어지고도 남았다. 그 맛과 멋을 대체할 게 있을까 골몰했지만, 여태 찾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인해 홈술을 즐기면서 와인, 수제 맥주를 골라 마시는 재미에 빠진 게 다행스러울 지경이랄까. 더는 소맥을 고집하지 않게 됐다.

 


이전과는 다른 나를 마주할 순간이 찾아온다. 20대와 30대 초반, 40대를 바라보는 30대는 다를 수밖에 없는데, 자꾸만 낯설다. 뭐든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냥 좋은 것만 할 수는 없었다. 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번 끊어보려고 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계속 마음먹었다. 계속 실패했다. 아마 앞으로도 하루 걸러 마음먹고, 하루 걸러 포기할 것 같다.

 


다른 날보다 커피를 많이 마신 날 저녁, 이 글을 쓰고 있다. 바짝 쓰고 집에 들어갈 생각으로 동네 카페에 자리 잡았다. 커피를 마시기에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빵이 당기지는 않고, 계산대 옆 진열창을 들여다보는데, 처음 보는 수제 맥주가 눈에 띄었다. 예의상 3초 망설이다 주문했다. 누가 말했던가. 음주 마감이 업무 효율을 높여준다고. 그래,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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