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거절의 기술

관계 중심에서 나를 중심으로

by 김명교

그런 때가 있었다.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서 어떻게든 돋보이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해내려고 고집을 부렸다. 계획한 일만 하기에도 야근을 해야 할 판인데, 해결사라도 된 양 내가 하겠다고 번쩍 손을 들었다.



“안 그래도 일 많을 텐데, 부탁해도 될까? 고마워.”



고맙다는 말에 아주 잠깐, 정말 잠깐 기분이 좋았다. 능력을 인정받는 느낌이랄까. 충분히 일이 많지만, 더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처럼. 그래, 이 정도 부탁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 뭐. 이쯤이야 금방 끝낼 수 있지. 그럼, 내가 누군데. 할 수 있고말고.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날은 제시간에 퇴근하긴 글렀으니까. 그래도 스스로 하겠다고 한 거, 누굴 탓하겠나. 어떻게든 해야지.



괜히 오지랖 넓게 굴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이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던 사람이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밝게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을 떠나는 게 아닌가. 요즘 말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던 옛 어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나는 누울 자리였던 거다. 인정에 목마른 내게 앓는 소리를 하면, 나서서 도와주겠다고 할 거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거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공감을 얻었던 간단한 테스트가 있다. ‘나는 어쩌다가 예스맨이 되었을까? (EBS 세상의 모든 법칙)’에 소개된 ‘착한 아이 증후군 테스트’다.



의사결정을 할 때 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른다

부탁을 제대로 못 들어주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모든 사람을 믿을만하다고 여긴다.

나쁜 기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쉽게 상처받는다.

상대방이 화를 내면 대처를 못 한다.

눈치를 많이 본다.

할 말을 못 해서 답답하다.

항상 손해 보는 느낌이다.



9가지 항목 가운데 5개 이상 해당하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항목 하나하나를 짚어가면서 나의 성향을 살폈는데, 3개 정도 해당했다. ‘휴~.’ 착한 아이 증후군까지는 아님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부탁을 제대로 못 들어주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부분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코칭학 교수는 착한 아이 증후군을 ‘상대방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거나 사랑받고 싶을 때 나타나는 관계 중심적인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스스로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일종의 ‘자기주장 결핍증’이라고 본다. 개인의 의견보다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회 문화 때문에 자기주장을 못 하고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분석한다. 그중에 거절하지 못하는 나도 있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타인 지향적이었다. 상대가 나한테 실망할까 봐, 배려와 존중을 모르는 사람으로 비칠까 봐,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을까 봐, 관계가 소원해질까 봐…. 하나같이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반대로, 거절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내가 더 소중하니까. 나의 욕구와 감정, 생각 먼저 제대로 알아야 남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래야 나를 중심으로 한 진짜 내 인생을 살 수 있다.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아니, 이제는 그 누구보다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심리수업 365>을 펴낸 정여울 작가는 ‘에고와 셀프의 대화’를 추천했다. 나의 깊은 속내와 대화하는 법을 훈련해야 진정한 자신이 편이 되는 법을 배운다고 설명한다.



너무 어려운 부탁을 하는 타인의 간절한 표정을 보면서, 나의 에고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부탁을 거절하면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그 사람도 너무 힘들어서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셀프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라면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부탁은 하지 않으려고 애쓸 거잖아. 그 사람은 어려운 부탁을 하는 순간, 너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한 거야. 아무리 그 사람이 힘들더라도, 지금 네가 가장 우선적으로 돌봐야 할 사람은 너 자신이야. 내가 볼 땐 지금 이 순간 가장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는 너야.”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심리수업 365 ‘진정으로 자신의 편이 된다는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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