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만 내디뎠을 뿐인데, 잡념이 떨궈졌다
지나가지 않는 건 없었다
피자 한 조각씩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출근길에 마음먹었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아침부터 공기가 달랐다. 미색 트렌치코트 사이로 봄바람이 파고들었다. 며칠 전부터 찬 기운이 조금 가시면 밖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었다. 소풍 나온 것처럼, 전염병이 돌기 전처럼, 사람들을 피해 마스크도 벗고 마음껏 봄기운을 느껴보자고 다짐했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바로 그날이었다.
회사 출입구를 빠져나와 2분 남짓 걸으면 양재천이다. 계단에 걸터앉아 피자 박스를 열었다. 배달원이 가져다준 피자는 아직 따뜻했다. 양재천 산책로를 따라 핀 벚나무를 바라보면서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벚꽃 뷰 맛집이 따로 없었다. 예약도 필요 없고, 좋은 자리를 두고 서로 앉으려고 눈치 싸움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 꼬투리 터진 목화솜이 나뭇가지마다 매달려 솜 다발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피자와 봄바람이 어우러져 입속으로 들어왔다.
한 입, 또 한 입….
점심시간이 두 시간쯤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동료와 함께였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 오감을 동원해 온전히 즐기고 싶었다. 같은 장면을 멍하게, 아껴가면서 바라봤다. 피자 조각이 작아지는 것도, 점심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스쳐 가는 것도, 며칠 후면 떨어질 벚꽃조차 아쉬웠다. 다 붙잡아두고 싶었다.
내 몫을 다 먹고 나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원한 아이스 카페라테를 마시면서 조금 걷고 싶었다. 쌉싸름하고 고소한 카페라테 한 모금에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생각이 겹쳐 마음이 복잡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잡념이 하나씩 머릿속에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한걸음에 마감 스트레스가, 또 한걸음에 분노의 불씨가 줄어들었다.
20분쯤 걸었을까. 꽤 많은 걸음을 내디딘 후에는 한결 머리가 맑아졌다. 걱정이나 고민 따위를 머릿속에 들일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야속할 뿐이었다. 시리기만 했던 겨울이 하루라도 빨리 지나가길 바랐는데…. 이제는 붙잡아두고 싶어 하다니.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마음을 괴롭히던 부정적인 생각도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고 다시 긍정적인 것들로 채워진다.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고, 앙상하던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아 꽃을 피우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처럼. 어떤 생각이든 머릿속을 드나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했을 텐데. 춥다는 핑계 대신 산책하면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다 보면 조금 더 빨리 깨달았을 텐데…. 어쩌면 스스로 온갖 잡념들이 빠져나갈 틈조차 주지 않고 오히려 꽉 움켜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고비를 넘은 느낌이다. 별거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든 이보다 더한 일이 생길 수 있다며 나를 다독인다. 혹독한 계절을 견딘 대가로 나이테를 하나 더 새긴 벚나무처럼, 내 마음도 지난겨울보다 튼튼해졌을 테니까. 높은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서퍼처럼, 이제는 조금 감정의 굴곡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운명은 겨울철 과일나무 같아 보일 때가 있다. 그 나뭇가지들이 다시 초록색으로 변하고 꽃이 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아도,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