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이직에 성공했다. 한동안 연락도 줄이면서 안정을 찾길 바랐는데, 이렇게나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 다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다고 했다. 누구보다 참 열심히 사는 녀석이라 ‘조금만 참고 버텨보면 어떨까’라는 말조차 건네기 어려웠다. 오죽하면 고향으로 내려가서 마음 편히 살고 싶다고 했을까.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던지는 어설픈 위로나 조언은 되레 상처가 된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할 텐데 나까지 안부를 핑계로, 빨리 괜찮아지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으니까. 조용하게, 충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을 위한 가장 좋은 결정을 내리길 바랐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어쩌면 인생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는 걸 택했다. 그녀를 힘들게 했던 것들을 향해, ‘안녕’을 고했다. 웃으면서, 보란 듯이. 역시 그녀는 현명했다. 연락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그녀는 새카맣게 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해도 해도 끝없이 밀려드는 새로운 업무, 애써 10을 달성하면 15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으냐던 회사의 요구, 조금만 더 하면 높은 연봉, 승진까지 기대할 수 있겠다는 상사의 희망 고문까지. 그 사이에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다. 노력하는 만큼 스스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기꺼이 할 수 있을 텐데, 또 다른 성장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인내해볼 텐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최선을 다해 일한 결과, 그곳에는 다 타버린 몸과 마음만 남았다. 번아웃, 소진이었다. 그렇게 고향에 다녀오겠다며 잠시 서울을 떠났었다.
지난 주말, 이직을 축하하려고 케이크를 사서 잠시 집에 들렀다. 한 달 만에 만난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고향이 좋긴 좋은가 보다. 가족의 품이 그렇게 좋은가 보다.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어.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네가 서울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서운하더라. 잘 생각했어. 이직 축하해.”
마주 앉아 이직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데,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입사를 축하합니다. ○○○○와 윈윈(win-win)하는 관계가 되길 희망합니다. ….’
그녀가 입사할 글로벌 기업의 입사 축하 메시지였다. “윈윈하는 관계가 되자고? 너도 잘되고, 나도 잘되는 그런 관계? 비즈니스 파트너도 아니고, 회사와 직원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한단 말이야?”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짧은 문자 메시지에서 한 개인의 삶도 존중한다는 뜻이 읽혔다. “그래, 이곳이라면 너를 지키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특히 경험한다. 일과 개인의 삶, 인간관계…. 그 어디에서도 나의 존재는 희미할 뿐이다. 일에 몰두하느라 건강을 잃어도,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소중한 사람에게 소홀해도, 일의 가치와 의미가 사라진 지 오래됐어도, 이끌리듯 쳇바퀴를 또 굴린다. 몸과 마음에 이미 관성이라는 게 들러붙어서 눈앞에 쳇바퀴가 보이니까, 일단 굴리고 본다. 숨이 찬지, 발에 상처가 났는지, 달리고 있는 속도가 적당한지, 아니면 너무 빨라서 곧 넘어질 것 같은지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도저히 따라가지 못해 발걸음이 꼬이고 고꾸라지고 나서야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는 의지조차 사라진, 번아웃 상태에 놓인다.
용기가 필요하다. 가끔 쳇바퀴에서 내려올 용기. 버거울 땐 속도를 줄일 용기. 아니다 싶을 때는 다른 쳇바퀴로 갈아탈 용기. 갑을관계 말고 윈윈 관계를 추구할 용기.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용기. 삶의 우선순위를 내가 정할 용기. 그리고 소진되지 않으려는 용기.
사회생활도, 인간관계도 결국 내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면 냉정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행복하고 즐거워야 그것들 또한 의미 있다. 나를 기준으로 삼아야 지치지 않는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그녀가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