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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교 Feb 12. 2022

‘미라클 나이트’는 안 될까요?

저녁형 인간의 변명

새해를 맞이한 지 두 달째 접어들었다. 갈수록 시간 가는 속도가 빠르게 느껴진다는데, 정말 그렇다. 아직 지난해를 보낼 준비가 안 돼 있는데, 새로운 해를 살아가려면 뭔가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두 달 전 올해에 머물러 있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몇 가지 있고 약간의 소진을 겪다 보니, 2021년을 향한 아쉬움이 미련으로 바뀌어 2022년인 지금까지 흘러넘치나 보다.

 


사실, 이제는 달력을 보지 않고서는 해를 구분하기조차 쉽지 않다. 고작 하루 차이로 그동안의 시간을 ‘지난’해라고 선을 그어 정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을 준비에만 골몰하는 것은 때론 매정해 보인다. 시간이 흐르는 건 자연의 이치라서 저항하려 한들 이겨낼 수 없고, 과거에 머물러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안다. 그래도 뭔가 대단하지는 않지만, 지난 일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 온 것들을 단 며칠 만에 ‘과거’라고 묶어서 기억의 다락방에 올려두고 일상을 재설정하기에는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의 연속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흔한 새해 다짐이라던가 거창한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그저 일기나 쓰자 했다. 그저 책이나 실컷 읽자 했다. 책 읽은 흔적도 SNS에 남기기 시작했다. 책과 나눈 대화 기록쯤 되겠다. 훗날 글 쓰다 막히면 들춰볼 심산으로.

 


SNS 세상에서는 2022년을 알차게, 후회 없이 보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최근 자기계발 트렌드가 ‘미라클 모닝’이라더니, 아침형 인간들은 이곳에 다 모여 있었구나. 이들은 해조차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독서나 운동, 공부하는 일상 루틴을 인증 사진으로 기록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주변 사람에게 자신이 경험한 미라클 모닝의 ‘기적’을 들려주고 동참을 권한다. 커뮤니티를 형성해 으쌰 으쌰 용기도 북돋운다. 긍정의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저도 할래요!’ 외칠 뻔했다. 내가 저녁형 인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아침형 인간들의 부지런한 하루를 보고 있자니 쭈굴쭈굴해지는 것만 같았다. 기상 알람 소리에 속으로 ‘5분 더 자도 돼’를 세 번 정도 반복하다 겨우 일어나는, 아침에 커피 없이는 정신이 깨지 않는, 아침에 바닥을 치던 컨디션이 오후, 저녁으로 갈수록 살아나는(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각), 한 마디로 저녁형 인간인 내게 그들의 일상은, 넘어설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맞닥뜨렸을 때 경험하는 당혹, 또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경의를 느끼게 했다. 강한 의지를 품은 인간에게 한계는 없다는 걸 새삼스럽게 확인하기도 했다.

 


나 같은 저녁형 인간을 두고 게으르다, 의지가 약하다고들 한다. 그동안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등교하고 회사에 나가는 게 당연했으니까.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해가 지기 전까지 최대치의 노동력을 발휘해야 하는 농경시대가 막을 내린 지 오래지만, 여전히 우리는 과거의 시간표에 맞춰 사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여니까. 다행인 건, 지금이라도 이런 통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는 연구가 종종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 런던정경대 사토시 가나자와 교수팀이 미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수면 패턴과 IQ의 연관성을 분석했더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집단이 IQ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스페인 마드리드대학 심리학과 연구팀도 12~16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저녁형이 창의력이 높고 귀납추리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이 우수하게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작가, 예술가, 프로그래머 등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직군에서 특히 저녁형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출처: 헤럴드경제, 2022년 1월 14일자, KISTI 과학향기>

 


스스로 위축되지 않으려고 한다.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다를 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을 뿐, 넋 놓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저녁형 인간의 생체 리듬에 맞춰 모두가 잠든 이 시간을 나를 위해 쓰고 있다. 잠깐만. ‘미라클 나이트’는 안 되는 걸까. 진짜 잘할 자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건 뇌과학자 러셀 포스터가 TED 강의에서 한 이야기.

 


네 번째 근거 없는 믿음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건강해지고 부유해지고 현명해진다는 겁니다.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더 많은 부를 가져다 준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제 경험상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단지 지나치게 우쭐댄다는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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