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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교 Jan 13. 2022

고약한 성격

단 음식을 즐기지 않는데, 아침부터 바닐라 플랫 화이트가 마시고 싶었다. 아이 등원에 나서는 남편에게 바닐라 시럽을 한 번 덜어낸 바닐라 플랫 화이트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한 번 어떤 것이 꽂히면, 해결되기 전까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약한 성격을 가진 나는, 시계를 쳐다보면서 커피가 도착할 시간을 점쳤다. 

 


생각이 많아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이건 어떨까, 저건 이렇게 하면 더 나을까. 어디까지 생각이 이를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다. 나중에는 이러다가 기상 알림이 울리는 건 아닐까 싶어 머리맡을 지키던 휴대전화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새벽 세 시. 억지로라도 잠들어야 하는 시간. 그 후로도 펼쳐진 생각을 조심스럽게 접어 작게 만드느라 한참을 눈만 감은 채 뒤척였다. 

 


하지 않던 생각에 빠져 시간이 흐르는 자연스러운 현상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조바심이 난다는 건, 꽂혔다는 이야기다. 처음 나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날도 그랬고, 이야기가 쌓여가자 책을 내보자고 결심할 때도 그랬고, 출판 계약서를 받아들고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진열된 책을 상상하던 그 날도 그랬다. 날개를 단 생각이 형체를 갖추고 내 앞에 실제로 존재하려면 충분한 고민과 그럴듯한 계획,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실행력 따위가 필요한데, 일단 펼쳐놓느라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생각의 밤. 이 세계 속에서는 못 할 게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온통 내 세상이다. 무려 내가 주인공인!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온통 새카매서 캄캄하다가도 살포시 내리덮으면 눈이 부실 지경이다. 현실이라면 시간과 노력, 인내, 용기, 자신감 같은 값을 치러야 했겠지만, 그걸 내놓으라고 하지도 않는다. 아, 잠을 지불하는 구나. 그래도 공짜처럼 느껴진다. 잠이야 몰아서 자면 되니까. 밤의 시간을 영상으로 기록한다면 한 편의 그럴듯한 환상 영화가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해피엔딩. 여느 영화처럼 러닝타임이 존재한다는 건 아쉽다. 날은 밝아온다. 

 


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픽션보다 논픽션에 가깝다. 실현 가능성이 0에 가까운 일에 힘과 열정을 투자하기에는, 스스로 선택한 역할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르기 마련이니, 어쩌면 픽션형 인간이 논픽션형 인간으로 탈바꿈한 것이 기회비용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다. 생각의 밤에서 유영하길 즐기는 걸 보면 말이지.

 


해가 뜨면, 그 사이 어느 즈음, 타협의 공간을 만든다. 그래서 쓴다. 볼펜을 쥐고 꾹꾹 눌러 종이를 채우다 보면 (이상적으로) 하고 싶은 것들과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알아서 나란히 줄을 선다. 이 녀석들을 적절히 버무려 또 한 번 선택할지 말지 정해야만 온전히 잠에 빠져들 수 있다. 

 


잠잠할 때면 어김없이 솟아나는 이 고약한 성격이 때때로 버겁지만, 또 때때로 이 고약한 녀석 덕분에 나는, 무엇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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