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그리고 서른넷의 11월
엄마와는 단둘이 가는 첫 여행을 했어. 정확히 하자면 엄마가 진해에 가야 하는데 너와 함께 했지.
그렇더라 결혼하기 전에 엄마는 어디든 누구든 쉽게 만나고 약속하고 움직였는데, 아직 어린 네가 있으니 육아를 대신해줄 누군가가 있지 않다면 늘 너와 한 팀이 되어야 해.
(그런 의미에서 나중에 커서 결혼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결혼 전에 신나게 여행 다니렴!ㅋ)
아무튼 그전까진 하나 할머니께 부탁드리고 다녀왔던 진해를 이제는 함께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동행하기로 했단다.
3살 무렵이었나 엄마 혼자 진해를 갔었던 때에 여행 가기 전 밤마다 너에게 엄마가 어디 가는지 얼마 있다 오는지 등등을 너에게 설명해주고 대답을 듣고 하던 동영상이 생각난다.
엄청 귀여운 목소리로 '응.' '엄마만 진해로가.' '나는 할모니랑코자.' 등등 대답했는데ㅎ
진해에 있는 프롤이모 알지? 엄마에게 마치 제2의 친정집 같은 느낌인 건데 ㅎ 엄마에게 소울메이트가 있다면 프롤이모랄까?ㅎ 너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든 어떤 이야기든 나눌 수 있는 사람. 대화뿐만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 사람 말이야.
프롤이모가 살고 있는 진해는 우리와 아주 멀어. 끝에서 끝. 그래서 엄마는 종종 버스를 타고 내려갔었는데, 아무래도 아직 너에게 4시간 이상의 버스는 무리일 것 같아서 기차를 타고 갔어. 기차 안에서 너는 아주 기특하게도 그림도 그리고 책도 보면서 긴 시간을 평화롭게(?) 함께 해 주었어.
엄만 어딘가 여행을 위해 이동하는 동안의 시간이 그렇게 좋더라. 여행을 간다는 설렘도 있고 이동하는 동안에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여행 가서 만날 사람을 생각하며 편지도 쓰고 음악도 듣는 그 시간이 너무 좋더라. 너와 함께 하는 기차에서도 가능할까 했는데, 아주 완벽했어. 함께 프롤이모에게 두장 분량의 편지를 썼으면 말 다했지 뭐. 유모차나 아기띠가 필요 없고 이제는 정말 엄마와 손잡고 함께 걸으며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마치 친구와 하는 여행 같았어.
우리의 첫 목적지는 부산. 모처럼의 여행이니 바닷가 정도는 가야지. 세밀하게 계획을 한 여행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기차를 타는 동안 엄마가 온전히 너를 돌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하단 걸 알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아도 그때그때 어떤 선택을 해도 충분히 함께 하겠구나 싶더라고.
부산역에 도착해서 둘러보다 발견한 사탕가게에서 여행 동안 먹을 간식도 조금 사고, 전철로 어느 바다로 가볼까 생각하다 전철을 갈아타지 않는 다대포 해변으로 결정.
원래는 해운대에 갈까 했었는데, 부산역 안에 케리어 보관서비스가 만석이라 케리어를 가지고 갈 수밖에 없어서 같은 노선 안의 바다로 결정했어. 예상치 않은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러웠지. 다대포 해변 역에 보관함에 케리어를 맡길 수 있었고, 무엇보다 다대포 해변의 바다가 아주 좋았어. 아빠와도 한 번 더 오고 싶을 정도로.
우리가 도착한 다대포 해변은 다른 바다들과는 좀 달랐어. 설레는 마음으로 너와 함께 뛰어갔더니 세상에나 엄마는 사막에 온 줄 알았어. 모래가 너무 곱고 고와서 바람에 흩날릴 정도였거든. 해변 자체도 바다까지의 길이가 아주 넓어서 정말 사막에 여행 온 느낌이었어. 부드러운 모래 감촉에 우린 둘 다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두고 한참이나 맨발로 걸었지.
발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모래의 느낌.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알, 시원한 바람, 파도소리. 그리고 너의 신난 웃음소리. 나중에 네가 커서 이중에 한두 가지 네가 떠올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싶은 순간들이었어. 물 만난 코카처럼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던 네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물론 엄마는 열심히 영상도 사진도 남겨두었다!!ㅎㅎㅎ)
그리고 프롤이모가 오고 나서야 발견한 갈대밭. 해변 바로 옆에 갈대밭이 있을 줄을 정말 몰랐어. 바람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갈대밭의 파도는 바다의 파도만큼이나 좋았어.
그사이를 뛰어다니는 네 모습은 더 좋았지. 가을 한가운데에 쏙 들어와 있는 네 모습이 얼마나 이뻤는지 몰라. 온몸으로 가을을 느끼고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이번 여행 정말 잘 왔구나 싶더라. 엄마도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계절의 모습에 사진을 얼마나 찍었는지ㅎㅎㅎ
그리고 엄마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프롤이모와의 시간들에서도 아주 착하게 함께해주었어. 엄마만큼이나 프롤이모를 좋아해 주어서 여행을 다녀오고 한참 동안에도 이모와 함께했던 만들기 자랑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 (역 시프 롤 이모는 사랑ㅎㅎㅎ)
둘째 날 이모는 출근을 하고 너와 함께 진해 구경을 나섰어. 우리 동네가 아닌 다른 곳에서 너와 함께 손을 잡고 걷고 있으니까 정말 여행 온 것 같더라. 같이 벚꽃빵도 사 먹고 신기하다고 쪼르르 달려가서 감탄하고 까르르 까르르 웃고 뛰어가고 아마도 새로운 풍경들이 너 역시 설레 하는 것 같았어. 여기저기 외국여행이라도 온 듯 슈퍼 하나 카페 하나가 다 괜히 새롭고 재미있었어. 아이와의 여행에서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생선구이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그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갔어. 엄마는 어딜 가나 높은 곳에서 아주 작아지는 풍경들과 함께 넓고 넓은 하늘을 보는걸 너무 좋아해. 그래서 등산을 좋아하나 봐. 아무튼 우리는 제황산공원에 오르기 위해 귀여운 모노레일을 타고 정상에 도착했어. 정상에는 전망대와 함께 박물관처럼 옛날 모습들도 함께 볼 수 있도록 되어있어서 너와 함께 한참을 관람하고 전망대에 올라 진해를 한눈에 볼 수 있었어.
바람이 좀 많이 불었지만, 전망대에서도 박물관에서도 너와 엄마 단 둘 뿐이어서 너무 좋았어. 엄마와 함께라면 어디든 천국이라고 말하던 너도 좋았겠지?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이모네 동네로 돌아와서는 이모가 퇴근하기 전까지 또 근처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았어. 요새는 어딜 가나 공원이나 놀이터가 잘 돼있어서 좋은 것 같아. 이 동네 저 동네 공원 놀이터 투어 하기도 좋고. 다 똑같아 보이는 놀이터들도 네 나이 때는 조금만 달라도 새롭고 재밌고 그랬던 것 같아. 엄마는 자매였어서 언니와 함께 이 동네 저 동네 탐험하며 곧 잘 놀았는데, 너는 외동이니까 엄마가 열씸히 함께 해 줘야지.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도 이번 여행 정말 즐거운 하루였다고 말하면서 네 자리에서 열심히 그림 그리는 너를 보고 있자니 아, 수고했다. 다 키웠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간 육아에서 오는 조금은 답답했던 마음이 뿌듯함으로 아주 조금 바뀌었던 것 같아. 이제 정말 어디든 함께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
코로나가 끝나면 꼭 타보고 싶다는 비행기도 충분히 탈 수 있겠어.
잘 자고 우리 또 만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