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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다D Jun 01. 2021

굶주린 하이에나의 자유시간

엄마의 자유시간

"하루의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유시간이요? 그건 아마도 먹는 건가요?"


엄마라는 명함을 가진 후로, 자유를 누릴 자유를 누려 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 자유시간이라는 것이 나에게도 주어졌다.

육아 과부하에 걸린 나를 위한 남편의 배려로 2월의 어느 토요일,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되었다.


새벽 첫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날아간다.

뻥 뚫린 해안도로를 달려 갈칫국 맛집에서 훌륭한 한 끼를 먹는다. 그리고는 커피 잘하는 카페에 들러 뜨끈한 라테 한 잔을 주문한다. 고소한 라테를 한 모금을 넘기며 비취색 제주바다를 눈에 담는다. 여기가 파라다이스가 아닐까? 따뜻한 햇살 아래서 살짝 졸아도 본다.


해질 무렵 공항 근처 동문시장에 들러 딸이 좋아하는 천혜향과 남편이 좋아하는 오메기떡도 조금 산다. 면세점에 들러 두리번거리다 큰 맘먹고 나를 위한 선물도 하나 골라 마지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상상만으로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고 코 평수가 넓어진다. 당장 실행에 옮긴다.

포털사이트에 제주 항공권을 검색한다. 제주행 첫 비행기 편 가격이 오만 원쯤이고, 왕복으로는 십만 원이 넘는다. 일하러 갈 땐 표 가격쯤은 개의치 않았었는데 손가락이 선뜻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즐거운 상상 한번 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인터넷 창을 닫는다.


결국 나는 쌍둥이 언니를 호출했다.

우리는 자매면서 서로를 제일 잘 아는 베스트 프렌드이다. 각자가 하고 싶은 것 한 가지씩을 함께 하기로 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쌍둥이 언니는 쇼핑을 하고 싶다고 했다.


기다리던 토요일이 되었고 설렌 마음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식사와 밀린 빨래, 거실 정비, 딸 J가 외출할 경우를 대비해 입을 옷까지 준비해두었다. J가 일어나기 전 몰래 집을 빠져나올까 하다 아침 식사라도 함께 하는 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아침부터 남편과 J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구웠다.


배를 든든히 채웠으니 자유를 누리러 가기만 하면 된다. 이 순간 집이 아닌 그 어디도 제주 앞바다가 될 것이다. 오전 11시를 시작으로 밤 10시에는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신데렐라처럼 설레는 외출을 했다.


2월 말의 날씨라고 하기엔 따뜻한 봄날이었다. 자유를 누리기 딱 좋은 날씨라고나 할까?

막상 나서니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우리는 이동시간은 줄이면서 독서와 쇼핑을 다 할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장소를 선정하기로 했고, 김포 아라뱃길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뱃길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을 할 수 도 있고 근처 아웃렛에 들릴 수도 있었다.


도착한 카페는 뱃길이 훤히 내다보이는 통창에, 찰랑거리는 차르르 흰 커튼으로 멋을 낸 4층 규모의 큰 카페였다. 1층에 자리를 잡고 시원한 아이스 라테와 케이크 한 조각도 주문했다. 편안한 소파에 앉아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펼쳤다. 고흐의 세심함과 삶의 통찰을 느끼며 여유로움을 만끽하려는 순간, 꿈같은 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코로나 19 제재로 인해 카페에 한 시간밖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책을 덮었다.


이어 쇼핑을 하기 위해 아웃렛으로 향했는데, 주차장부터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날이 갑자기 따뜻해져서 그런지 나들이 나온 인파가 상당했다. 하기는 아이들 때문에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던 우리도 이렇게 나와있으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혼잡함 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보며 옷을 골라 보았지만 단순히 볼 때와 입어 보았을 때의 격차는 너무나 컸다. 우리는 허무한 미소를 지으며 허무한 쇼핑을 마무리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가 아쉬워 동네 카페에 들렀다. 그렇게 커피 한 잔을 더 하는 것으로 신데렐라 두 명의 자유시간은 끝이 났다.


돌이켜보니 오늘 하루 무얼 했나 하는 아쉬운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마치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 굶주린 하이에나였던 것 같다. 자유시간이 주어졌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더 많이 누리려 하니 마음은 조급했다. '시간'에 굶주린 하이에나는 '여유'라는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서 너무 많은 것을 폭식한 것이다. 시간도 써 본 사람이 잘 쓰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시간을 쓸 줄 몰라 서툴렀다.

그렇다고 오늘의 모든 것이 아쉬운 것은 아니다. 오랜만의 자유시간은 동명의 자유시간처럼 달콤했다.

생산적인 무언가를 해야만이 하루를 잘 살아낸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자유로웠던 감정만은 기억에 남았으며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었다.


다만 다시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에는 시간에 굶주린 하이에나가 아닌, 여유롭고 우아한 한 마리 백조이고 싶다.



(Photo by Jon Millig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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