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잘하는 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방바닥을 깨끗해질 때까지 문지르고, 물건의 제자리를 착착 찾아 주고 나면 어지럽던 마음도 한결 가볍고 고요해진다.
자신의 평생직업을 선택할 때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라고 하던데, 청소나 정리 정돈하는 일을 했어야 했나?라는 생각도 머리를 스친다.
사실 주부라면 누구나 이 정도의 내공은 가지고 있을 테고, 나도 이제 8년 차의 내공을 가진 보통의 주부일 뿐이다.
신혼 시절, 고개만 돌리면 주방 겸 거실, 안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그마한 집에 살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쓸고 닦고 십분 안에도 끝낼 수 있었기에, 청소라는 것이 굳이 시간을 내서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식사 준비, 설거지, 빨래, 분리수거, 청소기 돌리기와 같은 집안일은 남편과 나누어 함께 했다.(남편이 돕는 것이 아니므로)
출산 후 본격적으로 육아를 시작하게 되면서 청소와 집안일은 부업이 아닌 주업이 되었다.
이삼일에 한번 하던 빨래는 세탁기를 매일 돌려도 산처럼 쌓이고, 옷을 널 건조대의 자리와 옷걸이는 늘 부족했으며, 비가 오는 습한 날엔 빨래가 잘 마르지 않아 눅눅하고 냄새가 나기도 했다.
이때 말로만 들어왔던 첫 번째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의류건조기'였다.
출산선물로 무엇이 필요하냐는 할머니의 물음에 두 번의 고민도 없이 건조기라고 대답했다.
주변 엄마들의 말에 따르면 수건을 넣으면 호텔 수건으로 바뀌어 나온다더니, 수건이 정말 한 올 한 올이 보드랍게 살아있는 게 아닌가? 아침에 세탁한 옷이 두어 시간이면 구김도 없이 뽀송뽀송하게 말려져 나왔다. 건조기가 꼭 필요하냐고 묻던 남편은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빨래를 돌려댔다. 옷을 널고 걷고 안 해도 되고, 무엇보다 먼지가 덜 나서 좋았다.
주의할 점도 있었으니, 소재에 따라 사이즈가 줄어들 수 있는 옷은 따로 널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도 경험이겠지만, 가족 모두가 의도치 않게 스키니 핏의 옷을 입게 되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은 옷을 구입할 때 일부러 한 사이즈 큰 옷으로 사서 건조기에 넣어 줄여 입기도 한다.
이렇게 신문물을 접하고 나니, 집안일에 문명의 도움은 꼭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두 번째 신세계인 식기세척기를 들였다.
당시 6인용 새 상품은 핫딜 가격으로 39만 원 정도에 살 수 있었지만, 열심히 손품을 팔아 새것 같은 중고를 11만 원에 구입했다. 오래된 아파트라 수전이 특이해 11만 원을 들여 설치한 웃픈 사연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진 잔고장 없이 본분을 다하고 있다.
식기세척기는 그릇에 달라붙은 밥풀 정도만 거친 야자나무 솔로 쓱쓱 문질러 애벌 후 넣어주기만 하면 된다. 이때 그릇이 서로 겹쳐지지만 않게 착착 쌓아주면 반짝반짝 빛나는 새 그릇이 되어 나온다.
한 시간이 넘도록 싱크대에 서서 아까운 물을 흘려보내며 1차 그릇 설거지, 2차 냄비와 프라이팬, 3차 젖병까지 닦고 나면 언제나 티셔츠의 배 부분은 흠뻑 젖어있곤 했다.
식기세척기는 매일 끼니마다 반복되는 설거지와의 전쟁을 끝나게 해 주었다. 더 큰 12인용짜리였다면 냄비에 프라이팬, 들통까지 몽땅 넣어버렸을 테지만 이 작은 6인용만으로도 큰 행복을 느끼고 있다.
마지막 신세계 아이템은 바로 로봇청소기이다.
크지 않은 평수에 나름 날 다람쥐 같은 청소 실력을 가지고 있어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하루는 쌍둥이 언니네 집에 가니 로봇청소기가 구석구석을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청소를 마치고 충전기로 돌아갑니다”라는 말과 함께 거실 바닥은 반지르르 빛나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런 삶이야!"라는 생각과 함께, 그때부터 로봇청소기 앓이에 들어갔다.
청소기의 종류도 많고, 가격과 기능이 천차만별이어서 공부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제품을 고르고 가장 싼 가격에 구입하기 위해 핫딜 카페에 알람을 걸어두고 3개월이 지났고, 결국 하얗고 예쁜 로봇청소기가 우리에게 왔다.
딸 J가 이름 붙인 로봇청소기 ‘토끼’는 정말 똑똑한 아이였다. 외출했다 집에 오면, 얕은 턱도 넘고,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곳은 가지 않으며, 정해준 곳을 먼지 제거에 물걸레 청소까지 야무지게 마치고 자신의 집인 충전기로 돌아가 있다.
아이를 키우며 빠듯한 살림에 집에 현대 문명을 도입시키기까지의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사도우미 이모님께 도움을 청할 성격도 못된다라고 쓰고, 사실은 전격적 워킹맘이 되어야 도움을 청할 수 있기에 그렇게는 못한다고 고백한다.
신세계를 선물한 가전제품들의 치명적 단점은 가격이 비싸다는 점이었으나, 초기 투자비용이 높은 점을 감안하더라도 반드시 살만한 가치가 있다.
이 세 가지의 가전제품의 활용으로
가족의 삶이 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 다 된 빨래를 건조기에 넣은 후 커피 한 잔을 마실 여유가 생겼으며, 예쁜 그릇을 마음껏 꺼내 식사를 해도 한숨이 아닌 콧노래가 나올 수 있으며, 무릎 굽혀 걸레질할 시간에, 무릎 굽혀 스쿼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시간의 선물로 지금 이 글도 써 내려가고 있다. 이건 남편에게도 해당되는 삶의 작은 변화이다.
퇴근 후 돌아온 남편이 지쳐있는 나를 보며 했던 말이 있다.
“네가 기분 좋아야 나도 기분이 좋아. 나에게도 J에게도 그대로 다 전해져!”
맞는 말이다. 가정에서 엄마의 기분, 에너지는 가족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긴 시간은 아닐지라도 노동을 덜 하며 얻게 된 마음의 여유, 커피 한 잔의 시간은 엄마에게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이 즐거운 마음이 딸 J에게, 남편에게 전해져 우리 가족에게 더 좋은 오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많은 엄마들이 문명이 준 시간의 선물을 누려보면 좋겠다. 그 시간을 또 다른 집안일이 아닌 엄마 자신을 위해 썼으면 좋겠다. 시간의 조각조각들을 모아 작은 변화부터 만들어 보는 것이다.
누가 나를 위해 온 몸을 불살라 자신을 내어준 적이 있었던가?
이 글을 빌려 우리 집 보물인 건조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토끼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아무 날도 아닌 보통의 어느 날에 아내에게 로봇청소기 한 대 턱! 하고 선물하는 센스 있는 남편이 되어보면 어떨까? 유경험자로서 가족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물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Photo by Kowon v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