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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력 '갑' 여학생

학교 현장 에세이

by 퀘렌시아

요즘 내 수업 시간엔 학생들이 발표 수행을 하고 있다.

발표 시간은 1분 30초 이상인데, 현장감 있는 발표를 위해 대본(시나리오)를 가지고 나갈 수가 없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사전에 대본을 쓰고 외우고 연습하고 나가서 외운 걸 복기하는 형식으로 발표를 한다. 다만 대본을 보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나마 실제로 말하는 듯한, 현장감은 있다.


예년에는 3분이 발표 시간이었으나 올해는 최소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이상만 넘기면 된다.


오늘 정말 놀라운 사건은, 남학생과 여학생, 연이은 발표 때 일어났다.

사건이라고 말할 법한 쇼킹하고 웃긴 일이었다.


시간이 1분 30초 이상이니, 보통은 2-3분, 좀 길면 5분이다. 특별히 커트를 하며 발표를 제지할 만한 학생은 여태 없었다.


그런데, 오늘 나간 남학생. 세상에 혼자 14분 넘게 발표를 했다. 그나마도 9분 30초가 넘었을 때, 앞에 앉은 학생들이 뒤에 서 있는 나의 반응을 보려 계속 고개를 뒤로 돌리는 횟수가 늘어나, 한계를 지어주는 교사의 사인이 나가야 할 상황에서

"어, 이제 얘기하던 것 마무리를 지어 볼까요?"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뒷 번호 학생들이 애간장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혼자 10분 정도를 했으면 최소 2-3명은 밀리는 것이기에 발표를 준비해 왔던 학생들이 그 상황에 의해 피해를 보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럴 경우 교사의 지도는 필요하다. 무한대 자유 발표가 아닌 수행 발표이기에.


그런데 이 남학생 왈,

"헉, 저 이제 4분의 1밖에 못 했는데요?"


푸하하하하~~~~~~

반 아이들 완전 폭소!!!!


정말 끝내줬다. 세상에.

그러고선 얼마나 당당하게 이어서 계속 발표를 하던지. 그 학생의 역동적이고 웃기고 생생한 발표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나 나나 엄청 웃겼다.


그 학생이 발표한 책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1, 2>였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인물들을 이 학생처럼 실감 나게 묘사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느낄 만큼, 아주 개성 넘치고 재미난 발표였다.


내 시간 독촉의 압력에 나름 반응을 했는지, 남학생의 발표는 약간 랩으로 변했다. 드디어 책 얘기가 끝났는가 보다 했는데, 남학생이 또 말을 한다.

"제가 이 책 왜 골랐냐면요, 사실은, 제가..... 마법사가 꿈이었거든요.!!"


푸하하하하하~~~~

또 한 번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오~~~ 친구야, 너 왜 이렇게 웃기니?

그런데, 이 말이 진실인 듯, 이 학생은 매우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고 다양한 마법 주문을 읊어대는데....

우리는 웃음을 참아야 할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웃지 않을 수 없어서 조금씩 웃음소리를 내며 학생의 마무리 발표를 들었다.


자, 이렇게 해서 사건 1이 끝났다.




그 뒤 나온 여학생.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단발머리 여학생.


아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한다.


"아, 앞에 00군의 폭풍이 너무 셌어 가지고는.... 제가 좀 진정이 안 돼요.(활짝 웃는다)"


이 여학생의 말에 우리 모두 공감을 할 수 있었기에, 초반 여학생들의 발표가 살짝 멈춘 것에 대해 그러련 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부터 오늘의 사건 2는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학교생활을 하는 가운데 겪는, 그러니까, 학교생활을 하는 가운데 겪는.... 이 학생이 음.... 학교생활을 하는 가운데 겪는.... 이 책은 00가 학교생활을 하는 가운데 겪는!!!!"


오~~~~ 뭐지? 되감기인가? 한두 번이 아니라 10번도 넘는, 계속 앞부분 억양만 조금 다른, 혹은 군말만 조금씩 다른, 그러고선 뒷부분 문장은 똑같은 내용이 계속 반복되는.... 도돌이표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의 말소리가 계속 들렸다.


오, 마이, 갓.


이게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처음 내내,

중간부터, 중간 내내 도돌이표,

중간에서 더 진행되지 않고, 계속 반복, 반복, 반복

.... 반복... 반복..... 똑같은 구절 계속 반복......


휴~~ 정말, 엄청난 쇼크였다. 교실은 정말 아수라장이 될 정도로 웃음을 참는 학생들의 몸부림, 뒤에서 난 학생들이 몸을 꿈틀꿈틀거리면 웃음을 참는 모습을 계속 바라봐야 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여학생은 꿋꿋하게 똑같은 부분을 무한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계속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웃음이 나와서 정말 정말... 눈물까지 난다.


여학생은 울지도 않는다. 찡그리지도 않는다. 화도 안 낸다. 포기도 안 한다.

같은 구절을 계속 반복해 가며, 그러다

"아!"

소리를 한 번 내고는 다음 구절로 넘어간다. 대본에 써 두었던 다음 구절이 드디어 기억난 것이리라.


그러고서는 또 그 구절을 읊다가 막히면, 무한 도돌이표로 반복을 하고, 그러다 또 기억나면 그다음으로....


이렇게 해서 그 여학생은 끝까지 자신의 발표를 마무리했다.


정말, 난 뒤에서 괴로워서 죽는 줄 알았다.


난 학생도 아니고, 명색에 교사인데, 아 세상에.

나 때문에 발표하는 학생이 기분이 나빠도 안 되고,

웃는 나 때문에 발표하는 학생이 발표에 지장을 받아서는 더더욱 안 되고,


학생이 힘들어하는데, 교사라도 같이 진지해 주어야 하는데...

난 정말, 뿅 어디로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웃음을 참아야 하는 그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여러분, 아시는가?

이 상황에서 웃음 참기는

아기 낳는 고통 참기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아기 둘 낳아 본 내가 이 둘을 비교하며, 진심으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마음이다.


눈물 찔찔에, 웃음을 억지로 참을 때 목구멍 안에서 올라오는 울컥 웃음 비슷한 소리.

아, 나, 참, 정말.


학생들, 나 좀 바라보지 말아 주시오.


정말 학생들한테 조금이라도 들킬까 봐 머리를 숙이고 열심히 평가지에 기록하는 시늉을 했다. 보통은 발표하는 학생을 주로 바라보다가 중간중간 평가지에 기록을 하는데.... 오늘 그 여학생 발표 때는

내가 살기 위해서, 웃음이 새어 나오는 얼굴, 입 모양, 눈물로 젖은 내 눈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썼다.


세상에, 정말 내가 여태까지 교직 생활을 하며 봐 온 그 많은 발표 중에.

오늘 이 여학생의 발표는 가장 압권이었다.


정말, 가장 웃겼고,

정말 여학생의 강단이 대단했고,

그리고선, 그 난리가 난 상황에서조차 멋지게 발표를 마무리하고 들어간 점, 와우~~~ 최고의 발표였다.

이 여학생 본인은 웃지도 않고 진지했던 게 지금 보니 진짜 대단하다.


여학생이 발표한 책은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라는 책이었다.


앞 남학생의 14분 발표보다 짧은 7분 대의 발표였으나,

우리에게 엄청 충격을 주었던 그 남학생의 발표보다 최소 4배는 센 파워로 교실 전체를 흔들어댄 발표였다.


여학생이 당차게 발표를 마무리하고 들어가자,

아이들은 쓰러졌다. 책상에 쓰러지고, 웃고, 책상 치고, 여태까지 들은 발표 중 가장 재미있는 발표였다는 말을 하는 등.... 우리는 이 여학생 발표가 끝난 후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1분 30초 발표가 이 두 명이 발표하고는 분위기가 초토화되어서...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다음 학생이 나와서 발표를 해야 했다면, 그 학생은 계속 나오는 웃음 때문에 수행 발표가 망할 수도 있을, 그런 상황.


다행히 수업 시간이 5분 정도만 남은 상황이라, 더 이상 수행 발표를 진행시키지 않았다. 나나 학생들이나, 그게 낫다는 것을 다 공감하는, 수행 평가 종료였다.


교탁 앞으로 나가서 내가 피드백을 해 주었다.

정말 대단한 학생 둘. 정말 인상적인 발표를 한 두 명의 학생.

그 둘에게 우리 모두는 박수를 쳐 주었다.


특히, 그 여학생은 그 강한 정신력, 끝까지 해 내는 근성, 포기하지 않는 면에서 최고의 칭찬을 해 주었다.

당찬 이 여학생, 자기가 쓴 대본 연습장을 앉은자리에서 나에게 보여 준다.

"선생님, 이거였어요.(활짝 웃음)"

와우~~~!!!!!


점수가 궁금하신가?


열정과 근성으로 개성 있는 발표를 수행한 두 학생

당연히 발표 점수는 '만점'이다.


점수와 별도로, 학교생활기록부 국어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란에 정말, 오늘의 이 수업 장면에서 보인 각 학생의 훌륭한 모습을 정성 들여 다 써 줄 것이다.


이렇게 친구들에게 큰 웃음을 주고, 자기 할 일에 진심을 다해 성의를 보인 학생들.

정말 최고다.


아 참, 이 웃긴 최고의 장면을 오늘 교생 선생님은 못 보셨다. 아이구, 아까워라...

내가 본 진짜 최고로 웃긴, 잊을 수 없는 발표였는데.


교생 선생님은 상춘곡 수업하는 2학년 문학 수업을 참관 가셨었는데...

정말 아까워하셔야 할 거다. ㅎㅎ


엄청 웃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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