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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렌시아 Jun 18. 2024

업무 과부하

수정 없는 의식의 흐름

끓는 물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 글자만 보면 음운 변동이 보인다. '끓는'이라는 단어는 [끌는--> 끌른]으로 발음된다. 아니, 끓는 물이 떠오른다라는 말을 썼는데 왜 끌른, 끌른이 떠오르냐고. 지금 내 상태이다. 난 지금 과부하 상태이다. 매일매일 음운의 변동을 가르쳤다. 글자 자음 하나하나, 모음 하나하나가 다 떠돈다. 둥둥둥 둥둥둥... 이렇게 가르치고 나면 돌아서면 잊는다. 난 요즘 이름도 금방 잊어 먹는다. 학생 이름도 까먹고 가르친 내용도 지나고 나면 까먹고. 까먹는 걸 다시 기억해 내려면 다시 또 봐야 된다. 보고 나면 또 까먹는다. 배불러서 안 먹고 싶은데 자꾸자꾸 글자도 까먹고 내용도 까먹고 생각도 까먹는다. 업무 과부하다. 금요일에도 야근했다. 월요일인 어제도 야근했다. 화요일인 오늘도 야근이다. 미쳤다. 금요일 글자를 보는 순간, [그묘일] 이 발음이 생각난다. 월요일도 [워료일] 이 발음이 생각난다. 미쳤다. 아까 학생이 질문했던 발음이다. ㄴ 첨가가 일어나나 안 일어나나 물었던 그 글자. 아 이러니 난 과부하이다. 글을 쓰는데도 자꾸 발음이 생각난다. 발음이 왜 생각나냐면 내가 한참 동안 음운의 변동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음운의 변동은 발음을 기준으로 한다. 고로 매일 발음을 본다. 오늘 음운의 변동 진도가 끝난 반이 나왔다. 이제 비문학 독해 진도를 나간다. 비문학 독해도 매우 매우 어렵다. 눈이 핑글핑글 돌아간다. 난 인문계인데 무슨 과학 지문들, 기술 지문들.. 생명과학 유전 지문도 읽고 문제 풀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싫다. 우주 천체, 과학 원리 뭐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도 읽어야 하고, 무슨 물리? 뭐 이런 지문도 읽고 가르쳐야 한다. 정말 싫다. 계속 나온다. 꿀벌, 개미 지문도 많다. 0과 1로 된 이진법 독해 지문도 읽고 이해해야 하다니... 너무 피곤하다. 인문 지문 읽는 건 재미있고 좋은데 과학 기술 생명 등등 내 머리로 바로바로 이해가 안 되는 독해 지문들을 읽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그래도 그게 내 업이다. 그걸 계속 읽고 문제를 풀고 설명을 해야 한다. 오늘부터 독해 진도를 나간 반이 있다. 오늘 그 반 독해는 예술 지문이었다. 플로티노스. 들어는 봤는가? 플라톤 미학과 플로티노스 미학에 대한 지문이다. 멋진 듯, 피곤한 일. 업무 과부하다. 수행평가 채점도 해야 한다. 내일 아침에 수행평가 채점 후 발견한 특이사항에 대한 협의를 해야 하고, 시험 문제도 오류 없나 다시 풀어 봐야 한다. 오늘 부서 행사라 외부 인사들 밤 8시 30분까지 와서 학교에 있는 날이다. 내 업무다. 이 일들을 언제 다 해야 할까? 수행평가 채점도 멀었고 시험 문제 다시 검토하는 것도 오늘 못 했다. 내가 게으름을 피운 게 아니다. 시간이 안 난다. 오늘 오전 내내 수업 교환이 들어와서 수업만 정말 주르륵주르륵 이어서 했다. 힘들다. 음운의 변동도, 예술 지문 독해도, 컴퓨터 기술 지문도 다 사라져라. 보기 싫다. 수행평가 원고지도, 기말 지필 평가 문제지도 내 눈앞에서 다 사라져라. 꼴 보기 싫다. 부서 업무, 학부모. 외부 강사들... 다 사라져라. 꼴 보기 싫다. 다 싫고 피곤한 나. 난 지금 업무 과부하이다. 과부하? 과부하는 음운 변동이 없다. [과부하] 지 소리 그대로 발음된다. 이런. 난 미쳤다. 지금 난 약간 꼴통이다. 속 시원하다. 꼴 보기 싫고 꼴통이고. 다 사라지고. 언어가 주는 쾌감. 글을 써서 푼다. 이 글을 잠시 쓰고 난 청소 지도를 간다. 빈 교실 청소인데, 담당 반이 고3이다. 고3 학생들은 종례하고 집 가기 바빠서 애들 매번 오는 것 체크하는 것도 일일 테고. 청소할 교실도 엄청 멀다. 고로 올해는 내가 봉사다는 생각으로 그 반에 담당 학생 지정을 해 달라는 말을 안 드렸다. 고로 내가 가서 교실을 청소한다. 매일. 이게 효율적이다. 그치만 난 사실 피곤하다. 매일 청소하고 문 닫고 문 잠그고 해야 하는 교실. 내가 맡은 특별실이 그렇다. 그 특별실이 날 부려 먹는다. 그래도 한다. 나름 봉사하는 마음으로 한다. 고3 이동반 학생들이 매번 책상을 막 엄청 엉망으로 움직여 놓고 간다. 그냥 두고 문을 잠글까 살짝 고민하다가 결국 제대로 옮겨 놓는다. 아침에 와서 수업하고 들을 때 정갈한 마음으로 수업하라고. 수업 들으라고. 나름 봉사다. 예쁜 마음. 오늘 이 일하고 이제 부서 일 할 거다. 난 과부하다. 업무 과부하. 오늘 하루는 참 길다. 젠장. 내일 하루도 길 텐데. 이런이런 젠장젠장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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