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달려온 시간
직장. 나. 아이. _2
교사 발령은 중학교로 났다. 중학교 3년 근무한 뒤, 고등학교를 희망하여 고등학교로 갔다. 좀 더 공부다운 공부를 하며 머리 큰 애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때는 임용고시 합격하고 얼마 안 된 뒤라, 한껏 무르익은 국어교육적 지식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중학교 교과서는 너무 쉬웠고, 나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아이들에겐 쉽게 가르쳐도 되지만, 힘들게 공부한 내 지식이 다 없어지는 느낌. 조바심이 나고 아까웠다.
이왕 이렇게 힘들게 교사가 된 거, 머리 굵은 고.등.학.생을 가르쳐 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그러면 내가 진짜, 그 어려운 내용 가르치는 '국어 교사'가 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스스로 있어 보이고 싶고,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 그리고 우리 엄마, 아빠 보기에 고등학교 선생님이 더 멋져 보일 거라는 속셈까지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나의 고등학교 교사 생활은 시작되었다. 고등학교로 옮기기 직전, 난 결혼을 했고, 고등학교 교사 생활 2년 차에 임신을 했다. 아이를 낳으면, 더도 덜도 생각 안 하고 부모님이 키워 주시면 된다고 생각을 했다. 형제 하나 없이 외아들인 남편. 시부모님이 내가 대학생 때부터 결혼해서 애 낳으면 키워 줄 테니 지금 결혼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씀을 하셨었기에... 두 분께 아이를 맡기는 게 선물이면 선물이었지 죄송하다는 부담감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쉽게 내 아이를 시부모님께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딸아이. 나의 첫째 아이이다. 그 아이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여웠는지, 아마.... 아이 있는 부모들은 설명 안 해도 알 거다. 그 아이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싶어서 모유를 먹였고, 직장 휴게실에서 쉬는 시간 짬짬이 유축을 해 가며 모은 모유를 주말마다 시댁에 공수했다.
그때만 해도 주 6일 근무일 때라, 토요일까지 출근하고 퇴근 후 시댁에서 아이를 데려왔다. 1주일에 한 번 보는 엄마, 아빠. 아이는 집에 안 가고 싶어서 우는 날도 많았다. 아이의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속상했고 말이다. 그 뒤 둘째, 아들아이도 낳았다. 두 아이 모두 모유를 먹이고, 두 아이 모두 시댁에 꼬박 맡겨 놓고 주말만 데려 오는 생활을 7년 했다. 첫째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말이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남편과 나는 돈을 벌었고, 둘 다 직장 생활하며 자기 전문성을 키우고 있었고, 아이들은 시부모님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며 잘 자라고 있었다.
토요일 날 두 아이를 데려오고 좋은 구경시켜 주고, 일요일 날 데려다주는 생활 7년. 내가 좀 힘들다는 생각만 했지, 특별한 문제는 못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보게 됐다. 딸아이의 머리를 빗질해 주다 동그란 흰 부분을 발견한 것이다.
'이게 뭐야? 이게? 여기 왜 머리털이 없어?'
어린 내 딸, 딸아이 머리에 원형탈모가 왔다고? 이게 뭐야? 이게.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 열심히 교사 생활하며 살았고, 열심히 주말마다 내 애 돌보고 했는데
뭐야... 내 애 머리에 원형탈모가 왔다고?
슬프고, 놀라고, 미안하고, 기가 막히고.
내 아이의 모든 행동과 말, 표정, 몸짓까지 다시 돌아보게 됐다.
"아.... 미안해. 아가. 엄마가 미안해. 우리 아가, 엄마가 이것도 몰랐네. 여태."
뼈저린 반성. 스스로에 대한 원망.
내가 허똑똑이었구나. 학교에서 좋은 교사이면 뭐 하냐고. 학교 애들만 잘 보면 뭐해. 내 애가 이렇게 엄마 고파서 아픈데. 이걸 모르고 있었다니.
이제 내 애들을 매일 봐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학기 중이었기에,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었지만, 매일 애들을 보러 시댁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가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살을 부비고, 안아주고, 뽀뽀를 한 뒤 헤어졌다. 매일. 시댁과 내 직장은 1시간 거리. 매일 고속도로 운전을 하고 가서 애들 보고, 다시 우리 집까지 운전하고 갔다. 그 뒤엔, 녹초. 녹초가 됐다.
고등학교에서 담임을 하면 매일 늦게 끝나 안 되겠기에, 아이를 매일 보러 가기 위해, 남들 다 하기 싫어하는 학생부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내 곁에 두고 키우지 못하는 엄마. 중학교를 내려갔으면 어쩜 데리고 살 수도 있었겠지만, 난 내 욕구를 선택한 엄마였다. 고등학교 애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욕구.
그게 뭐 얼마나 이득을 남겼을까? 내 만족감과 추억, 경험은 남았겠으나, 내 아이에겐 엄마 없는 서러움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해도 말이다.
그냥 이렇게 질문을 던져 본다. 하지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난 어쩜 똑같은 선택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중학교 교사와 애 데리고 키우는 엄마 역할보다 고등학교 교사와 애 떨어뜨려 키우는 엄마 역할을 선택할 것 같단 말이다.
나, 못된 엄마일까?
아이 엄마로서의 삶도 내 삶 맞지만, 교사로서 내가 성취하고 싶은 삶도 분명 내 삶이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고 싶지 않은 나, 둘을 적절히 섞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봐도 그게 최선책이다. 난 내가 못된 엄마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이런 성격, 이런 가치관의 엄마인 거다.
그 시기 고등학교에서의 내 경험은 현재의 내 인생에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 시기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작가랍시고 글을 쓰고 있는 일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그렇다. 나는 누구일까? 100퍼센트 아이가 우선인 사람일까? 아니, 상황 따라 다를 것 같아. 아이가 100퍼센트 우선일 상황에서는 당연히, 다른 거 다 버리고 아이를 선택할 거다. 하지만, 그게 아닌 상황이라면, 난 내 개인을 돌보는 욕구와 엄마로서의 역할 욕구를 조절하고 싶다. 나에게 항상 아이가 100퍼센트 우선일 수 없다. 나도 있고, 내 직장도 있고, 내 아이도 있는 거다. 나란 사람에겐 말이다.
하지만 아이의 원형탈모를 본 뒤, 난 중학교를 희망하여 내려갔다. 내 욕구니 뭐니 하는 것도 내 애에게 아무 일이 없을 때나 하는 얘기이지. '허똑똑이. 허똑똑이. 바보. 바보. 내 애를 잘 보는 게 가장 귀한 일이야.' 그 즈음, 난 이런 생각을 매일 했다. 중학교에서 퇴근 후 매일 시댁을 오가면 난 벼렀다.
'그래, 올해까지만 직장 다니면 돼. 초등학교 1학년, 그때 휴직하고 애들 데리고 오자. 같이 살자.'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하며 쉼 없이 달려왔다.
직장, 나, 아이.
이 셋에 내 애정을 쏟으며.
내 정성을 나누며.
달리고 달렸다.
<이 이야기는 과거 10여 년 전의 일이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