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지 못하는 편지

by 담은

그날 너를 그렇게 보내면 안 되는 거였어

여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밤이었어

그날도 언제나 그렇듯 알코올중독인 우리 아빠는 술을 마시고 세간들을 마구 부셔댔어.

집안에는 온통 집안에 있는 세간들을 집어던지는 소리와 깨지는 소리로 가득 찼어. 무서워서 어쩌지 못했던 “아빠, 무서우니까 그민 하세요.”라는 말도 하지 못하는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울기만 했어. 그 한마디를 했다가 또 얼마나 맞을지 잘 알기 때문에 울기만 하던 아빠는 나에게 수치스러운 욕지거리를 퍼주었지.

그러다가 분이 풀리지 않자 몸의 어느 곳이라고 인식도 하기 전에 무차별적으로 손이 날아왔어.

아빠의 딸인 나는 무방비하게 그 고통들을 모두 받아내야만 했어.

아빠가 토해놓은 온갖 역겨운 욕설과 폭력을 온마음과 온몸으로 온전히 받아낸 나는 서러운 통증을 견뎌내야만 했어.

그렇게 폭풍우 같은 시간이 잠시 누그러졌을 때 너는 집 앞이라며 떨리던 목소리로 전화를 했어.

갑자기 찾아온 너를 거절하지 못해 나갔었어.

어쩌면 집 앞에서 계속 기다리다가 악다구니에 받친 엄마의 비명소리와 아빠의 욕지거리를 네가 들을까 봐 나는 겁이 덜 컥 났었거든.

아무것도 몰랐던 너는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우유를 들고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 너에게 나는 나를 찾아와 준 고마움보다 반가움보다 두려웠어. 감춰왔던 내 진짜 모습이 들킬까 봐.


나는 너를 괴물 같은 우리 집으로부터 멀리 떼어 내어야만 했어. 그 날카롭고 부끄러운 소리들이 너에게 들리지 않도록 말이야.

그래서 나는 너를 재빨리 돌려보내기로 했어.

내가 나간 것을 알게 된 아빠가 나에게 퍼부을 폭력들이 무서웠기도 했어. 그래도 우리 집까지 와준 네가 나는 싫지 않았어. 그래서 늦은 밤 너를 집에 보내기 위해 택시가 잘 잡히는 곳까지 배웅해 주기 위해 걸었지.


그런데 있잖아 그때 나는 울음을 삼키느라 온 힘을 다하느라 너를 반갑게 맞이할 수가 없었어. 말 한마디도 다정하게 할 수가 없었어. 힘껏 입술을 달짝여서 내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왜 왔어? “라는 무미건조한 말 뿐이었지.

그리고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어. 더 밀을 했다가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거든.

울지 않기 위해 입을 앙 다물었어.

한번 울음을 터트리면 부끄러움에 내일은 너를 못 볼 것 같았거든.


공포스러운 밤에 무너져 버란 나는 네가 다정히 건넨 초콜릿우유가 고마웠어.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끝내하지 못했지.

그 초콜릿우유를 사 올 때 너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너의 마음을 받기엔 나의 마음이 너무 지옥이었어.

무기력하게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초콜릿우유를 떨어 뜨리고 말았어. 나는 허리를 숙여 다시 주우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나처럼 버릴 거면 줍지 마 “라고 화를 내었어.

그때 사실 주울 힘도 없던 나는 그 초콜릿우유를 다시

집지 않았어.

너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너를 무척 서운하게 했을 걸 일지만 나는 그때 죽고 싶었거든.

그렇게 뒤돌아선 너의 뒷모습에 나는 잘 가라는 인사도 못했지. 그 짧은 “잘 가”라는 한마디였는데도 말이야.

그렇게 너는 나에게 화난 등을 보이고 집으로 돌아갔어.

나는 무척 슬펐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있잖아..

그날 네가 나한테 화난 거 이해해.

그날 이후로 네가 날 미워한 거 이해해.


변명같겠지만 나는 말이야.

그날 나약하고 겁 많은 나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어. 비통하고 가엾은 내 삶을 들키고 싶지 않았어.

수치스럽고 아픈 나를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그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거든.


그날 네가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들을 들었는지 나는 너에게 물어볼 용기를 낼 수 없었어. 들었다고 하면 너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거든

차마 너에게 나의 불행을 묻히기 싫기도 했어.


그날 이후로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너에게 미안해.

너를 그렇게 차갑게 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로 인해 많이 아팠던 네가 생각날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시간이 많이 지나서 너는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

각자의 삶을 사느라 우리 시간을 멀리 왔잖아.


근데 말이야.

그때 아픈 나를 네가 알아봤다면, 나를 그렇게 두고 가지 않았다면 우린 달라졌을까?

나는 그렇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해.

왜냐면 그때 나는 마음이 고장 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을 여유가 없었거든.

네가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라도 말이야. ​


만약에 말이야.

나의 상황을 설명했다면 너는 나의 날 선 말들을 이해했을까?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 몇십 년이 지나도, 마음 한 귀퉁이에 너에 대한 미안함이 잊히지가 않아. 어쩌면 그 아픈 시절에 날 좋아해 준 고마움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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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너는 나의 마음을 끝까지 알 수 없을 거야.

이 사과가 너의 마음에 가서 닿지 못할 거라는 거 일아.

그런데 말이야.

이 말은 꼭 하고 싶어.

그날 너를 그렇게 보내서 정말 미안해.

그리고 꼭 행복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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