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트의 빈칸

by 담은

새해의 입구에서 나는 81개의 칸을 가진 마법의 지도를 그렸다. 이름은 만다라트. 그중에는 '2026년의 나'라는 핵심목표를 단단하게 박아 넣고. 마치 사방으로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내 꿈의 세부계획들을 정성껏 적어 내려갔다. 에세이 작가가 되어 내 필명을 박은 책을 내는 일, 매일 땀 흘리며 운하는 건강한 삶,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일. 칸칸마다 빼곡히 들어찬 검은 글씨들은 마치 머지않아 현실이 될 예언서처럼 든든했고, 그 격자무늬를 보고 있으면 이미 절반쯤은 꿈에 다다른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1년의 12분의 1이 지난 지금,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한 달의 궤적을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돌아오는 허탈감은 아쉬웠다. 되돌아보니 제대로 해낸 것이 아무것도 없는듯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리겠다던 다짐은 차가운 겨울바람 앞에 힘없이 무너졌고, 매일 밤 나를 기록하겠다던 일기장과의 약속은 '피곤하다'는 비겁하고도 흔한 핑계 뒤로 숨어버렸다. 어제도 굳게 마음먹었던 다이어트는 퇴근길의 허기를 이기지 못한 채 저녁밥상 앞에서 늘 힘을 읽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 하는 약봉지처럼, 내 만다라트의 계획들도 어느덧 내가 꼭 지켜내야만 하는 무거운 의무가 되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매일 가계부 쓰기는 영수증 뭉치 아래 파묻혔고, 그림을 그리겠다던 다짐은 빈 도화지 앞에서 멈춰 선 채 먼지만 쌓여갔다. 지키지 못한 계획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 구석에서 텅 빈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겨우 이것도 못하는 거야?'라는 날 선 자책이 마음의 문을 거칠게 두드린다. 계획대로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은 마치 짙은 안갯속에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막막하고 위태로웠다. 만다라트의 정교한 격자무늬는 어느덧 나를 응원하는 이정표가 아니라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는 창살처럼 느껴졌고, 지키지 못한 약속들은 갚지 못한 부채감의 목록이 되어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하지만 문득 생각을 고쳐 먹어본다. 나는 왜 이 칸들을 그토록 치열하게 채우려 했던 것일까. 타인이 실수를 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너그러운 배려를 잘도 건네면서, 왜 정작 나 자신에게는 이토록 가혹하고 서슬 퍼런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던 걸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만다라트의 빈칸은 실패의 낙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앞으로 채워나갈 수 있는 무궁무진한 여백이자, 숨 가쁘게 달려온 나에게 잠시 숨을 고르라고 손 내미는 쉼표였다.


매일 한 시간씩 공들여 그림을 그리지 못했어도 상관없다. 오늘 무거운 연필을 잡고 삐뚤삐뚤하게나마 선 하나를 그어보았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시작이다. 비록 달리기를 하지 못해 몸은 무거울지라도, 다이어리를 펼쳐 내 마음의 생채기를 돌아보려 노력했다면 그 과정 자체로도 내 삶은 충분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하루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무늬를 만들어 가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제 좌절은 짧게, 희망은 글게 가져가기로 했다. 매일 아침 쓴 약을 삼키며 내일의 건강을 간절히 꿈꾸듯, 지키지 못한 어제의 계획에 마음을 베이기보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계획에 따뜻한 숨을 불어넣어 보려 한다. 내 만다라트 지도는 결코 멈춰 서지 않았다. 여전히 뜨겁게 꿈틀거리는 현재진행형이다. 조금 삐뚤삐뚤하면 어떠랴. 남들보다 조금 늦게 가거나 중간에 길을 돌아가면 어떠랴.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여전희 나만의 색깔과 호흡으로 이 지도를 완성하고 싶어 한다는 그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 자체이다.


오늘 밤 나는 만다라트 계획표를 책상 위에 조용히 펼쳐둔다. 그리고 지난 한 달간 고생한 나 자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위로 한 조각을 건네본다. "괜찮아. 아직 우리에겐 12분의 11이라는 긴 시간이 남았으니까. 우리가 함께 채워갈 날들은 어제보다 훨씬 더 많아"


창밖의 밤공기는 여전히 차갑지만, 마음 한 구석엔 작은 등불이 켜진 듯 온기가 차오른다. 나는 다시 힘을 내어 펜을 든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스스로에게 다정한 하루가 되기를, 그리고 내 지도의 빈칸이 나만의 예쁜 색깔로 물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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