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준비하는 마음

by 담은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이라는 게 따로 있다면, 나는 늘 그 준비가 한참 늦는 편이다.

겨울 사무실의 공기는 유난히 건조했다. 그 정적을 찢고 들려오는 건, 날카로운 박스 테이프소리였다.

"찌ㅡ익, 툭" 아주 건조하고 단호한 그 소리가 내 심장 어딘가를 얇게 베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상무님들이 벌써 짐을 꾸리고 계셨다. 우리 현장의 사무실 마감 예정일은 2월 20일. 아직 열흘이라는 시간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고 한들, 설 명절이 끼어있었으므로 사무실에 나올 시간이 사나흘 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짐 정리는 마지막 날 한꺼번에 해도 될 터였다.


그런데 상무님들은 오늘 아침부터 컴퓨터 전원은 뽑고, 검은 전선들을 둘둘 말아 박스에 담고 계셨다. 늘 켜져 있어 반짝이던 모니터가 까맣게 꺼지는 순간, 내 마음속의 어떤 불도 함께 툭, 꺼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뭘 그렇게 서두르세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농담처럼 건넨 내 물음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상무님은 먼지 묻은 손을 툭툭 털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쌀 건데, 미리미리 해두는 게 낫지. 나중에 닥쳐서 하면 정신없어 "


그 말이 틀린 건 아닌다. 현장의 끝은 늘 도망치듯 분주하니까. 하지만 굳게 입을 다문 누런 박스들을 보고 있으니 목이 메어왔다. 그 박스들이 마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일이 끝났으니 너는 그만 나가. 이제 너의 시간은 끝났어. 우린 떠날 준비가 다 됐으니, 질척거리지 말고 너도 그만 정리해."


시간은 빠르게 흘러 또 다른 이별을 나에게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도, 작별의 인사도 다듬지 못했는데, 공간이, 그리고 사람들이 먼저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저 박스들 위에는 선명하게 목적지가 있다. 본사 대기, 교육, 다음 현장 같은 글씨가 망설임 없이 쓰여 있는 것 같았다. 그분들의 짐은 갈 곳이 있다. 그분들의 내일은 이미 정해져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고, 나의 책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비루한 사무원의 미래는 여전히 하얀 백지다.


남들은 벌써 다음 계절의 옷을 챙겨 있고 문 앞에서 서서 신발 끈을 매고 있는데, 나만 철 지난 옷을 입고 방 한가운데 멍하니 서있는 아이가 된 기분이다. "같이 가"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들이 가는 곳에 내 자리는 없었다. 그 명확한 틈새가 오늘따라 유난히 뼈아프게 애처로웠다.


벌써 네 번째 현장이다. 네 번의 만남과 네 번의 헤어짐. 이쯤 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이 미지근하고도 서늘한 이별에 적응하지 못했다. 현장에서 쌓이는 정은 참 얄궂다. 매일 발주처와 시공사 사이에서 지지고 볶으며,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거창한 위로가 없어도 웃음 한잔에 서로의 고단함을 녹여주던 사이였다.


그런데 그 끈끈했던 시간이, 준공이라는 단어 앞에서 그리고 다음 현장이라는 현실 앞에서 이렇게 서둘러 이별을 미리 고할 필요가 있나. 텅 비어버린 책상은 순식간에 차가운 겨울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 빈 책상을 바라보는데, 이미 헤어진 연인을 바라보듯 마음이 먹먹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또 보겠지 뭐. 이 바닥이 좁잖아."

상무님들이 무심하게 던지는 그 말들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그 한마디로 내 마음속의 일렁임이 깨끗하게 정지되지는 않았다. 나는 왜 네 번의 반복에도 이별이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아마 나는 사람에게 드는 정을 쉽게 접어 넣는 법을 우지 못한 모양이다. 준비 없이 다가가 마음을 열고, 준비 없이 그분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다.


오늘부터는 이별을 미리 연습해 보기도 한다.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며 며칠 후 펼쳐질 거친 풍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게 될 날을 떠올려 본다. 함께 일하며 걸었던 그 길이 사실은 끝을 향해 가는 과정임을 되새긴다. 그렇다고 정이 덜 드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불시에 닥치는 이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혼자만 멈춰 서 있는 기분은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다고 이별을 잘하는 세련된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헤어질 때마다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그 고립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을 뿐이다. 아직 이별할 준비가 안된 내 안의 서툰 진심을 바보 같다고 자책하기보다 조금은 다정하게 이해해 주려고 한다.


나는 이별 앞에서 늘 서툴고 느리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음 계절의 옷을 준비하는데 나만 지난 계절의 코트 깃을 여미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매 순간 내가 마주한 사람들에게 진심이다는 가장 정직한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매 현장마다 마음을 다했기에 보낼 때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만 뒤처지는 내 서툰 마음에게 조금 덜 미안해진다.


비록 네 번째 현장도 결국은 끝이 나고 모두 각자의 길로 흩어지겠만, 내 마음의 지표에는 그분들이 남긴 온기가 켜져 있을 것이다. 서툰 이별을 반복하며 조금씩 단단해지기보다, 조금씩 더 깊어지는 법을 배운다. 다음 현장에 가더라도 나는 또다시 준비 없이 정을 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임을 이제 알게 되었다.


#에세이 #이별 #직장인 #인간관계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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