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9 엄마와 나눈 첫 진심

평행선에서 한 점으로

by damhayeon



이 집은 프라이버시가 없어도 너무 없어.


병원에 가기도 전부터 엄마가 알아버리고 말았다.

알면 안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엔 모른 척 시치미 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냥 말해버리고 마는 게 속 시원했다.

엄마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아무래도 어른들은 좀 보수적이겠지? 싶다가도 솔직히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마 때문에 멀쩡한 척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사실 나는 그동안 심리상담과 약물치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자가진단만으로도 이미 나는 확신했고,

병원은 확진을 받으러 가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다행히 전문적인 치료를 시작하고 일주일 만에 안정을 찾았다.

너무 당황스러울 정도로 효과가 바로 나타나자,

지난 시간들이 억울하기도 했다.

조금만 더 빨리 갔으면 내 20대가 달랐을 수 있었는데...

그래도 남은 시간을 더 잘 보내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엄마는 내가 병원에 가기로 한 사실을 안 순간부터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변화가 달갑지 않았다.

내 고통의 상당 부분이 엄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인데,

엄마가 마치 나와 상관없는 제3자의 입장에서 나를 동정하거나,

혹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어

한 발짝 물러서는 회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서, 엄마랑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엄마와 함께 운동하기로 한 날,

엄마가 바빠서 퇴근이 늦어진 관계로 운동을 못 하게 됐다.

사실 아무 생각 없었다. 지키지 못한 약속은 이미 셀 수 없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엄마는 ‘약속했으니 산책이라도 가자’고 했다.

그 말에 조금 마음이 열렸던 것 같다.

하지만 대화하다 기분이 상해버리는 일이 잦았기에 산책 내내 긴장을 풀 수 없었지만,

놀랍게도 그날 우리는 그 아무런 다툼 없이 돌아왔다.

‘이게 된다고?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동안 켜켜이 쌓였던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꼈다.



방심한 사이 훅 치고 들어왔다.

같이 사고 싶은 옷이 있다며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러시네 정말.. 하지만 화내지 않고 일단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이 옷은 우리 체형에 잘 안 어울려서 사도 자주 안 입을 것 같아.”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택배가 올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신뢰가 쌓이는 순간이었다.



엄마가 내 말을 진심으로 납득하는 그 순간,

오랜 시간 닫혀 있던 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다.

감격에 겨워 엄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내가 치료를 받기로 결심한 이유,

내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나만의 원치 않는 '정기구독 서비스'에 대해서도.

평소 자기 입장만 얘기하던 엄마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눈빛을 보여주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날 대화가 잘 되었다고 생각한 이유가 서로 달랐다는 점도 놀라웠다.

엄마는 내가 화를 내지 않아서 좋았다고 했고,

나는 엄마가 내 말을 잘 들어줘서 좋았다고 했다.

여전히 같은 방향을 보지는 못했지만,

서로를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잘 없다.

가족들과 굳이 그 얘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 혼자 기억의 퍼즐 조각을 맞추려고 애써왔는데,

엄마와 함께 맞춰보는 작업을 했다.

엄마도 기억이 잘 없다고 했다. 그제야 알았다.

그 시간들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음을.

그리고 혼자가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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