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위로

길위의 당신에게 전하는 말

by Damian

떠날 수 있는 용기, 일상의 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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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가방을 꾸리는 행위는 단순히 짐을 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흩어져 있던 내 삶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나’라는 존재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첫 번째 의식이다. 우리는 익숙한 공간을 떠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나다웠던 순간을 되찾기 위해, 잠시 멈추기 위해 떠난다. 완벽한 멈춤은 가장 적극적인 떠남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우리가 머물고 있던 궤도는 강력한 관성을 지닌다. 잠을 깨우는 이른 새벽의 알람, 영혼은 내려놓고 달려야 하는 출근길, 반복되는 업무와 의무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영혼의 씨를 말려가며 마모된다. ‘나’의 감정과 생각은 뒷전인 체 사회적 역할로서의 내가 앞서기 시작하고, 어느새 내 안의 웅성거림은 외부의 소음에 묻혀버린다. 우리는 큰 변화없는 이 무감각의 상태를 사회적인 안정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적어도 어느 날 문득, 이 모든 것이 공허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설명할 수 없는 무기력과 상실감, 필자가 서문에서 언급한 ‘상처’란 바로 이렇게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나선다. 타인의 눈으로 규정되던 자신의 사회적 직함과 관계가 사라진 ‘그곳’에서 우리가 낯선 공기와 마주하며 완벽한 이방인이 된다. ‘그곳’에선 오롯이 ‘나’라는 존재가 가진 나만이 알고 있는 정체성 자체로 서게 된다. 이는 두려운 일이다. 자신을 보호했던 보호막이 홀연히 사라진 채 맨몸의 이방인이 되는 일은 우리를 한없이 외롭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외로움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외부의 공기에 노출이 되면서 다시 우리가 잃어버렸던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하는 성찰의 공간이 되어준다.

우리는 홀연히 떠난 여행의 첫날 밤, 낯선 침대에 누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이곳에 와 있는가?” “무엇을 찾으려 하는가?”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질문들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익숙함에 가려져 던질 필요조차 없었던 이 근원적인 물음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비로소 우리의 철학은 시작된다. 여행은 이처럼 우리를 가장 외롭고 불편한 자리로 이끌어, 가장 진지한 성찰의 문을 열게 하는 역설의 힘을 가졌다.

상처가 열어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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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마음은 예민한 감각의 더듬이를 갖는다. 서문에서 ‘상처 입은 마음은 감각에 민감하다’고 했듯, 슬픔과 상실감에 발가벗겨진 우리의 오감은 세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일상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갔을 풍경들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채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가령, 여행지에서 만나는 석양은 단순히 해가 지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루의 끝이 이토록 장엄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위로이자, 어떤 끝은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장엄한 서곡임을 온몸으로 깨닫게 하는 순간일수도 있다. 우리가 머물던 곳에서도 흔히 봤을 골목길의 낡은 벽돌 담벼락에 핀 작은 들꽃 한 송이는, ‘그곳’에서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기어코 생을 피워내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경이로움으로 느껴질 수 있다. 온몸의 발연기를 섞어 상인에게 건네고 받는 이방인끼리의 쑥스러운 미소의 교류를 통해 언어를 넘어선 인간적인 교감의 온기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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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발견은 우리의 시선을 ‘나’의 안에서 ‘세상’의 밖으로 향하게 만든다. 내 안의 상처에만 몰두해 있던 좁은 시야가, 타인의 삶과 세상의 다채로운 풍경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저 아이의 웃음은 때없이 맑구나”라는 깨달음은, 내 슬픔과는 무관하게 세상에는 순수한 기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그 인정은 내 상처를 하찮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슬픔 또한 세상의 수많은 감정 중 하나임을 받아들이게 하는 성숙의 과정이다.

그렇게 우리는 상처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운다. 상처를 억지로 지우거나 외면하는 대신, 그것을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하나의 창(窓)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상처가 있었기에 세상의 작은 아름다움에 더 깊이 감동할 수 있고, 타인의 슬픔에 더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여행은 이처럼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마법을 부리는 대신, 그 상처를 통해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을 선물한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나’의 조각들을 하나씩 되찾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