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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Mar 13. 2022

새 계절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다.

어떤 날은 계절로 기억된다. 가령, 휴가라면 모름지기 뜨겁게 더워야 할 것이다. 결혼하는 날은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푸르러야 제 맛이다.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시험장으로 향하는 수험생은 어쩐지 어색하고 상상하기 어렵다. 그 계절에 어울리는 날이 있고 그 날에 어울리는 계절이 있다. 마치 미리 짝이라도 지어놓은 것처럼.

크리스마스는 내게 겨울이다. 나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뺨에 불어와 닿던 바람의 질감을 기억한다. 차갑긴 해도 여느 겨울바람처럼 날카롭지 않은 바람이다. 끝이 뭉툭한 바람이라 그다지 춥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또, 멋을 부리느라 두텁지 않게 걸친 옷의 무게, 움츠려 든 어깨와 꼭 맞잡은 손, 목적지를 향해 빨라지는 발걸음을 떠올린다. 한겨울 차 없이 연애하던 시절의 이미지다. 그때는 예약된 식당에서의 식사까지가 치밀하지 못한 내 계획의 전부였다. 무작정 길에서 괜찮은 장소를 찾아 헤매는 날이 많았다. 물론 크리스마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길을 거닐다 보면 공기 중에 퍼져있는 크리스마스의 날씨와 분위기가 몸 전체에 두텁게 스며들어 입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의 겨울을 온몸으로 기억하게 된 것은 모두 그 덕분이다.

12월, 몸에 새겨진 기억들을 손에 들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힘들었던 올해를 여유 있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급히 떠나게 된 여행이니 가깝고 부담 없는 여행지가 기준이 되었다. 여러 곳을 고민했지만 결국 선택된 곳이 대만이다. 공교롭게도 여행 기간은 정확히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허나 대만의 12월은 춥지 않았다. 내가 알고 느끼던 추운 계절의 크리스마스는 이곳에 없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느끼는 건 노력이 필요한 일이 되었다. 여기저기 두리번대며 열심히 찾아야만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렵게 찾아낸 크리스마스의 조각이라고는 가끔씩 보이는 광고와 제품 포장이 전부라, 나는 크리스마스가 이 곳 대만만 실수로 빗겨지나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작 한국에서 3시간 멀어졌을 뿐인데도 도시 전체가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해 보여 가을의 크리스마스를 기대했던 나는 약간의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같이 여행 온 아내에게 괜히 오늘 크리스마스라고 상기라도 시키듯 시답잖은 말을 꺼내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라고.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이국땅에 있는 거라고.

상상했던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는 아닐지라도 여행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여행하는 내내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가 이어졌다. 많이 걸어야 했던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대만은 렌터카가 불법이라고 했고 우리는 그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내는 다른 건 몰라도 날씨만큼은 이 나라가 최고라고 했다. 나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 기온 24도 최저 기온 17도의 숫자로는 표현될 수 없는, 우리 체온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그야말로 모든 것에 적당한 날씨. 만약 이 날씨와 똑같은 온도의 물로 욕조를 채워놓는다면 몸을 담갔을 때 어떤 변화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온도에서라면 나는 종일 걸어도 편안할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마치 여느 크리스마스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녔다. 여전히 내 계획은 치밀하지 못해 일정 사이사이에는 구멍이 숭숭 나 있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그 공백을 채울 필요는 하나도 없었다. 조금 더 넉넉하고 느린 발걸음으로 여유 있게 돌아다니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충분히 쉬었고, 배가 고파지면 무엇이든 챙겨 먹었다. 멋진 풍경이 나오면 서로가 번갈아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중 대부분의 사진은 영영 우리 둘만 보게 될 것들이었다. 그렇게 오늘이 지나 내일의 아침이 와도 두렵지 않을 시간을 우리는 보냈다. 하나도 빠짐없이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쯤 잠시 잊어도 괜찮을 정도의 좋은 시간이었다.

낮 동안의 밀도 낮은 시간들을 켜켜이 쌓아둔 채, 크리스마스 당일 저녁에는 호텔 주변의 구석지고 조그마한 바에 들렀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밤이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니까, 분위기 있게 칵테일이라도 한잔 해야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한참을 찾아본 뒤 고심 끝에 우리는 조금 애매한 분위기의 바를 골랐다. 모든 것에 대해 망설이게 만드는 이상한 힘이 있는 곳이었다. 고급스럽지도 힙하지도 않은 이상야릇한 분위기가 있는 그 입구 앞에서, 우리는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어렵게 들어가고 나서는 다시, 나갈까 말까를 고민했다. 의자에 앉지도 일어서지도 않은 채 본인의 의향과 관계없이 서로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나는 괜찮은데 너 역시 괜찮으냐고. 크리스마스의 밤을 이런 곳에서 보내도 괜찮은지를 서로 궁금해했다. 술값이 너무 비쌌던 것 같기도 하고, 분위기가 초라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마치 끝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처럼, 밖으로 나가는 대신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것이야 말로 로컬의 묘미 아니겠냐는 여행자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또 역시 주저주저하다 목소리가 좋은 바텐더에 등 떠 밀리듯 칵테일을 한잔씩 주문했다. 그는 여태껏 본 적 없는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술을 제조해 내었고 우리는 각자의 술을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 내 술은 너무 세고 아내의 술은 너무 약한 바람에 우리는 정확히 같은 농도로 취할 수 있었다. 귀에는 나에게만 익숙한 멜로디의 제목 모르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마주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가 그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떠올려 보고자 했으나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사실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우리답게 시시한 얘기로 많이 웃었고 우리 답지 않게 진지한 주제로 한껏 심각해지기도 했다. 잠시 결혼한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도 있었다. 비싼 가격 탓에 생각보다 많은 돈을 내야 했지만 전혀 아깝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갈 즈음엔 결국 이 곳 대만에, 겸손한 크기의 바에 방문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 건 불과 5분 남짓의 짧은 귀가 길에서였다. 여전히 걷기에 적당한 바깥의 온도와 그 사이를 휘적대며 걸어가는 나란한 발걸음이 있었고 조심성 없이 좁은 골목을 지나쳐가는 택시와 오토바이 사이 꼭 맞잡은 손이 있었다. 조금 취한 탓에 다소 높아진 체온을 부드럽게 식혀 주는 끝이 뭉툭한 바람이 볼에 와 닿았다. 계절은 달라도 그건 영락없는 크리스마스였다. 찾아도 보이지 않던 크리스마스가 호텔 뒤 작은 골목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는 방법이 하나 더 늘었다. 새 계절의 크리스마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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