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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Mar 13. 2022

만남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끝에 대하여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고

  대부분을 잊고 지냈지만 어두운 방 안에 불이 켜지 듯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다. 이 영화를 본 건 사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대학교 1학년 글쓰기 수업이었다. 신입생은 필수로 들어야 했던 수업이었는데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을 적는, 다소 뻔한 과제 때문이었다. 영화는 인상 깊지 않았고, 나는 영화 내용보다는 수업시간을 공으로 때운다는 사실에 즐거워했다.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적어낸 글은 영화보다 시시했을 테고, 뻔한 과제보다 뻔했을 것이다. 나는 B+ 학점을 받았다. 하지만 글쓰기는 재능의 영역이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호랑이의 의미 따위를 적어낸 글에 B+ 학점은 차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점수다.

  사실 내게 부족했던 건 재능이 아니라 경험일지 모른다. 다양한 경험 없이 글을 써야 한다는 건, 마치 형편없는 실력의 요리사에게 터무니없는 재료가 주어진 상황과 같다. 그야말로 끔찍한 일인 것이다. 그때의 나는 만남의 과정을 경험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20살 대학생이 아니고, 이제 이 이야기가 만남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끝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잘 안다. 누군가는 장애가 있는 여성과 남성과의 사랑 이야기로 바라보기도 하는 모양이다.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조제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댓글도 보았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우리는 누구나 짝을 만나고, 서로 사랑하며, 그리고 결말을 맞는다. 여기에는 더 특별한 사랑도 덜 특별한 사랑도 없다.

  왠지 모르게 나는 아내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리 춥지 않은 겨울이었고, 교환학생을 끝낸 뒤 한국에 온 지 겨우 며칠이었다. 나는 그렇게 얼굴이 하얀 여자를 오랜만에 보았다. 소중한 사람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건 꽤나 낭만적인 일 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동시에 재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첫 만남의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앞으로 내 삶에 어떻게 자리 잡을지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영화 속 남자 주인공도 자신에게 칼을 휘두르는, 유모차를 탄 걷지 못하는 소녀와 서로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저 바라는 일과 실제로 그 바람이 이루어져 현실이 되는 일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나는 이제 결혼한 지 막 2년이 넘었다. 주변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도 많다. 그래서 언제 결혼을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머릿속에 종소리가 울리면 첫눈에 상대방을 알아보게 될 거라 믿는 유형의 사람들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난 “연애의 시작과 과정은 기억하지만 연애의 끝, 그러니까 결혼을 결심한 순간은 잘 모르겠다” 고, 그저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런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좀 있어 보이게 꾸며 내긴 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영화에서는 조제에게 ‘조제’가 주인공인 소설의 속편을 어렵사리 찾아주는 장면으로 사랑의 시작을 표현한다. (조제의 이름은 여자 주인공 스스로를 부르는 애칭이며,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 그리고 호랑이를 통해 사랑의 과정을 보여주고, 물고기로 이별을 암시했다. 만남의 시작과 끝, 그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정확히 잡아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마음이 커지는 건 마치 계절이 변화하는 것과 같아서 변화의 순간을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다고 믿는다. 꽃이 지고 난 후에야 봄이 지나갔음을 알아채는 시인처럼,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럴 수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시작하는 순간과 관계가 더 깊어지는 계기, 혹은 더 멀어지는 때를 알아채는 민감한 감각을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마치 키가 자랄 때마다 벽 한편에 표시해 놓는 아이의 마음으로 기억 속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싶다. 시간이 지난 뒤 하나하나 꺼내어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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