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했던 마케팅 협력업체 직원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지난 2월 코로나 때문에 거진 1년을 준비했던 행사가 취소된 후, 먹자 먹자 하며 미루기만 했던 약속이었다. 그들과는 2년을 함께 일했다. 클라이언트와 에이전시, 그러니까 계약으로 만나게 된 사이였지만 프로젝트가 끝난 지 오래되었으니 이날 만남은 계약서 조항엔 없던 일이었다. 프로젝트가 결실 없이 유야무야 마무리되었지만 우리끼리라도 제대로 된 끝맺음은 해야지라는 마음이었다.
만남은 예상했던 대로 즐거웠다. 그들과는 일할 때부터 합이 좋았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았고, 쓸데없이 뒤로 머리 굴리지 않는 괜찮은 동료였다. 내게 그들은 좋은 에이전시였고 그들도 나를 좋은 클라이언트라 불러주었다. 박 대리님은 며칠 전부터 이번 만남을 꽤나 기다리고 기대한 모양이었다. 식사 중 그는, 이렇게 클라이언트 분들과 편하게 식사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한껏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그 말과 그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거 정말 듣기 좋은 말인데요,라고 말하는 대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는 일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하는 방법에 대해서,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해서, 일의 어려움에 대해서, 처음 일했던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있었던 수많은 좌절에 대해서, 그러니까 일하는 슬픔과 기쁨에 대해서 2차까지 옮겨가며 떠들었다. 갑자기 프로젝트가 취소되는 바람에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그래서 추억이 되어버린 '우리의 일'에 대해서도 한참 얘기했다. 안타깝지만 길게 보면 잘 된 일이라고 서로를 위로했다. 힘들지만 보람 있던 순간들을 복기하며 나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일'에도 어쩌면 낭만 같은 말랑말랑한 것들이 들어갈 자리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덕담과 농담이 쉼 없이 오가던 그때, 별안간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아무래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열심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조금 창피한 생각이었다. 우당탕탕 시끄럽긴 해도 열정이 있고, 열정만으론 표현할 수 없는 애정 비슷한 것도 일하는 중간중간 내게서 새어 나왔었다고, 조금 더 잘하고 싶은 마음과 일의 성과는 서로 상관없이 존재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항상 최선을 다했었다고, 요령피지 않았었다고, 조금 차갑긴 해도 일 앞에서 진지한 것이 나의 특징이었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싶어 졌다. 취한 탓이었는지 돌아가는 버스에선 왠지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무릇 회사란, 그 안에 살며 일하는 사람은 숫자로 치환해 버리고 열정은 연료처럼 소비해 버리는 무정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누군가의 애정 어린 마음은 치기와 어리숙함이 되어 결국 지워져 버릴것이다. 몇 년 전 내가 열심히 했던 일들을 이제는 컴퓨터 속 파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의 내가 하는 일도 결국 몇 년 뒤엔 흔적 없이 사라져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그때 같이 일했던 시간과 열심이었던 순간들은 어떻게든 기억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 함께였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게 생각하면 서운한 마음도 어느새 저 멀리 물러나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