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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Aug 09. 2020

생일이 8월이라 엄마를 생각합니다.

 태양이 가장 뜨거운 , 혼자가 아닌 둘로 태어난 사실이 죄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이번 생일을  그런 기분으로 맞았다. 서른 중반의 나이로 어른이  나는  이상 생일의 기쁨과 설렘에 젖지 않는다. 이제야 알게  사실이 하나 있다면 1년에  번뿐인 날이 생일만은 아니라는 , 1년을 고대하며 설레던 생일도 결국  365분의 1 크기의 평범한 날에 지나지 않다는 .
 그러니까 생일이 다가오면 나는, 다만 내리쬐는 태양 아래 쌍둥이를 배에 품은 아직 젊었을  또래의 엄마를 생각한다.

  생일은 8 10, 더운 여름의  중간이다.  이면엔 너무 당연해서 놓치기 쉬운 비밀 같은 것이 하나 겨져 있다. 그건 8월생 중엔 성공한 사람이 많다더라, 유재석도 8 생이라던데, 역시 8월생이라 그런지 쾌활하고 열정적이구나, 라는 생일자 중심의 미신 같은 것이 아니다. 임신한 아내를 곁에 두지 않았더라면 영영 몰랐을 엄마와 관련된 사실이다.
 여름에 출산하는 산모는 임신 막달의 가장 무거워진 몸으로 무더운 여름을 나야 한다. 그래서 임산부들에겐 8월이 막달인 산모가 가장 힘들다는 얘기도 공공연히 나온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헐떡이고 땀이 흐르는 계절이 여름이다. 몸이 불어 거동이 불편한 데다 기본 체온까지 높아진 임산부에게 그런 여름은 자비 없이 가혹할 것이다.


 쌍둥이를 임신한 엄마의 배는 다른 임산부들보다 갑절은 컸다. 고작 임신 6개월이었던 임신 중반부터 이제  아이가 나오겠다, 아이 언제 나오냐는 소리를 들어야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날 당시  몸무게는 2.9kg였고 형은 3.1kg였다. 4kg 넘으면 우량아 소리를 듣는데 엄마의 뱃속엔 도합 6kg 아이가 있던 셈이다. 태반이나 양수 무게까지 더해  무게만 족히 10kg 넘었으니  힘듦을 미루어 가늠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1987 8 엄마의 여름은 그렇게 터질  부른 배만큼    고되었을 거라고, 나는 감히 보지 않고도 말할  있는 것이다.

 엄마는  더운 여름을   벌로 났다고 했다. 하늘색 옷감의 꽃무늬 원피스였다. 임부복이 다양해지고 유행이 생겨날 만큼 세월이 흘렀어도  옷만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아니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물에는 어떤 기억 같은 것들이 묻어난다고 하던데, 땀으로 절었을  옷에는 어떤 추억이 깃들어 있었을까. 엄마가 추억 얘기에 한창이던 그때, 나는 엄마와 함께 드라이브 중이었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가만히 엄마의 얘기를 들었다.  시절 엄마의 모습이 궁금해진 나는 머릿속으로 아주 부드러운 촉감의 하늘거리는 하늘색 원피스를 상상했다. 마침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날씨가 아주 화창하여 맑았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기분 좋게 맑았는지 날씨에 대해서만  분을 이야기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옷감이 그날의 하늘빛을 닮았을 거라 대책 없이 믿기로 했다. 정말 아름다운 옷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우리를 낳은 ,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까지  이유 없이 자주 아팠다. 간혹 체하기도 했고 몸살도 많이 앓았다. 젊은 나이에 입이 돌아가 침을 맞고 누워있던 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차마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쌍둥이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쌍둥이도 자연분만을 하는 모양이지만, 엄마는 우리를 낳기 위해 배를 가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왕절개가 아주 위험한 수술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겪은 수술은 조금 달랐다.  번에 둘을 꺼내기 위해, 보통 가로로 배를 가르는 대신 세로로 배를 갈랐고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몸에 남겼다. 그때의 수술이 몸에 무리가 되었던 탓일까. 아니면 출산  충분한 산후조리 기간 없이 곧바로 우리를 돌보았기 때문일 수도. 어쨌거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니까, 원래 몸이 약한 이에게 아이는 건강과 맞바꾼 아픈 행복이 되기도 한다. 하필 쌍둥이로 건강하게 태어난 나는 그렇게 엄마가 아픈 이유가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번은 친구와 밖에서 놀다가 아픈 엄마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키는 이미 웬만한 성인 못지않게 컸지만 마음만은 자라지 못한 상태였다. 길을 가다 중학생 이상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음에도  만은 가족보다 친구가 먼저인 여느 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엄마는 완연한 환자의 목소리로 지금 몸이 좋지 않으니 집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특별한  하나 없이도 능히 하루를 보낼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  손에는 때마침 야구 글러브가 하나 들려있었는데 도저히 순순히 집으로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노는 생각뿐이었던 내가 처음 했던 생각은 ', 이대로 들어가기 아쉬운데'였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집에 들어가도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간호라는 것이 특별한 기술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가능하단 사실을 알기엔 어렸다. 내가 집으로 겨우겨우 돌아갔던     두통의 전화를  받고  뒤였다. 엄마는 나를 낳기 위해 무언가 포기해야 했을 테지만 나는 그렇게 아주 작은  하나 놓치는 것을 아쉬워했다. 나는  사실이 부끄러워 슬프고, 이제야 슬퍼 부끄럽다.

 엄마는 약해진 몸으로도 우리를 끔찍이 사랑했다. 마치 건강과 사랑은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아끼고 챙겼더랬다. 우리가 아기일 적에,  모두 심한 감기에 걸린 날이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치 다시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귀가 화끈거리고 가슴이 뜨거워지곤 한다. 열이 심했고, 이미 몸이  대로 커버린 우리 둘을  번에 병원으로 옮길 방법이 없어, 엄마는 우는 아이를  명씩 안고 미친 듯이 병원으로 뛰었다. 병원은 고작 십분 거리였지만, 변변한 유모차가 없어 한번에  명씩 옮길 수밖에 없었다고.
 아픈 아이 하나는 집에 남겨두고 그저 빨리 달릴 수밖에 없었던 부모의 마음을 나는 지금도 도저히 헤아릴 방법이 없다.

 이제  있으면 아이가 태어난다. 그러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아빠가  것이다. 아직 부모가  준비가  되었다는 나의 말에 누군가는 부모가 된다는  애초에 준비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주었다. 그래도 나는 8 생일날 엄마를 생각한다. 더운 여름에 배가 남산만큼 부른 어느 마른 여자를, 하늘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아이 둘을 돌보는 젊은 엄마를 떠올린다. 혹여나 미숙하게 태어난  아들이 인큐베이터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어떻게든   충분한 크기로 낳기 위해 애썼던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려 한다. 그것이  부모  준비의  번째 단계가  것이다.
 오늘 나는 특별한  없이 생일을 보내기로 했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어도 좋은 왁자지껄한 축하 파티도, 주변인들의 관심도 없지만 그런 것쯤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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