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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Jul 02. 2020

진지한 사람

회사에서 누군가와 점심을 먹다 생각했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별안간 떠오른 생각이다. 아무래도 나는, 진지한 사람이 좋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어느샌가 좋아졌다. 점점 더 좋아진다. 오글거리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뱉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오랜만에 보낸 '잘 지내냐'라는 무뚝뚝한 말에 성은 똑 떼고 이름만 부르며 '보고 싶다'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더 좋아질 것만 같다.

나는 이것이 내 나이 듦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되어가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멈추지 못하고 그렇게 변해갈 것만 같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사뭇 진지했던 나는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훌륭히 사회화를 거쳤다. 꽤나 성공적이어서 나는 적당히 진지한 얘기도 할 줄 알지만 너무 무거워서 버거워지지 않는 무난한 사람이 되었다. 나를 아는 누군가는 '네가 어디가 무난한 사람이냐' 고 타박할지 몰라도, 나는 스스로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볼 때 세상의 대부분은 정규분포표 중간쯤에 위치한 무난한 사람으로 채워져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탄성력이란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그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힘이다. 그것의 과학적 정의와는 별개로 나는 그 힘이 사람의 성격에도 적용한다고 믿는다. 한없이 다른 방향으로 늘어나기만 했던 내 성격이 드디어 그 힘을 다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탄성력을 넘어서는 힘으로 다시금 반대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간다면 모를까, 움직임을 멈춘 나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진지하고 재미없는 나로 돌아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한껏 진지해진 나는 이제 더 이상, 시답잖은 농담이나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무난하게 어느 말에나 웃음을 띄며 분위기를 맞추고 싶지 않다. 잘 맞지도 않는 사람과 마주 않아 적당한 얘기를 적당히 나누다가 헤어지고 싶지 않다. 그런 만남은 내게 아무런 영감도 주지 못한다. 주제는 무엇이 되어도 좋으니, 다만 깊게, 아주 깊숙이 바닥까지 내려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스킨스쿠버를 해본 적 없지만 그런 대화는 분명 깊은 바닷속을 헤엄치는 느낌과 비슷할 것이다. 그 대화의 바닷속을 헤엄치며 어제 본 영화의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를 한참 동안 얘기하고 싶고,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토론하고 싶다. 사는 것에 대하여, 나이 듦에 대하여, 건강과 사랑에 대하여, 가족에 대하여, 글쓰기에 대하여, 지나온 날들에 대하여 낮부터 자정까지 지치도록 말하고 그만큼 더 듣고 싶다.

다행히도 그런 얘기 나눌 사람이 나에게도 몇 명쯤은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들과 술 대신 커피 한잔을 마시는 순간을 상상한다. 햇살이 창에서 반대편 입구까지 깊숙이 들어오고, 따뜻한 질감의 원목 인테리어로 꾸며진 천고 6미터 이상의 카페가 있다면 좋겠다. 카운터 옆에는 나이 들어 쉽게 피곤해지는 개 한 마리가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 눈을 꿈뻑꿈뻑 뜨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끔씩 눈길을 던져줄 것이다. 커피 한잔을 내려도 최선을 다하는 바리스타가 두 세명쯤 상주하고 있어 언제든 향이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그런 곳이 있다면 분명, 주인은 너무 돈이 많은 바람에 테이블 회전율이나 좌석수 따위는 고려치 않고 카페를 지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얘기를 나눌 것이다. 대화가 끝나고 난 뒤 카페를 나설 때면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게 되겠지. 마치 한참 동안 물속에 있다 나온 사람이 젖은 숨을 내몰아 쉬는 것처럼. 그렇다면 나는 오래도록 만족스러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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