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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May 29. 2023

커피를 쏟고 새 커피를 받았다

작은 친절 앞에서 머뭇거리기

오늘따라 이상하리 만치 뚝딱대었다. 지갑을 두 개 챙기고, 지하 1층에 가야 하는데 1층에서 내리고, 식당은 3층인데 2층으로 향했다. 유현이가 하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해 자꾸 되묻고 엉뚱한 소리나 해대는 건 평상시 내 모습 그대로라 해도 뭔가 잘 안 풀리는 날인 건 분명했다. 작은 사고는 카페에서 터졌다.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오자, 나는 픽업대로 향했다. 한데 커피 컵에 보여야 할 빨대 구멍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구멍처럼 생긴 홈에 빨대를 억지로 꼽아보려 했으나 막힌 구멍이었다. 고작 빨대 구멍 하나 찾지 못해 허둥대는 나를 보고 점원은 여기 이 부분을 위로 제끼면 된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는데, 괜스레 마음만 급했던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한 손으로 만지다 그만, 커피를 몽땅 쏟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당황한 나는 연신 죄송하단 말을 반복했다. 휴지로 테이블을 닦으려 했으나 커피를 훔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몇 장 없는 휴지는 이미 흠뻑 젖어 버렸고, 손 안에서 곤죽이 되어 버렸다. 내 손이 커피 범벅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더 안타까웠던 건, 팔려고 내놓은 상품임이 분명한 스티커 더미에도 커피 물이 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민망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점원은 숙련되고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불편한 기색도 없이 내게 화장실은 밖에 있으니 얼른 손을 닦으시라고 안내해 주었다. 나는 차마 점원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얼른 자리를 뜰 심산으로 쏟아진 커피 컵을 손에 들었다. 컵에는 약간의 커피가 겨우 남아 있었다. 아쉽지만 이거라도 남아서 다행이란 생각으로 남은 커피를 홀짝 마셔 보았다. 아직 에스프레소와 물이 채 섞이지 않았던 탓인지 꽤 진한 맛이 느껴졌다. 물 조금 더 넣으면 어쨌거나 먹을 수는 있을 것 같은 수준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남은 커피에 물을 조금 넣어 달라 부탁하고는 손을 닦으러 화장실로 향했다.

여기까지가 사고의 전말이다. 놀랍게도 화장실을 나온 나를 반긴 건, 장난스러운 표정의 유현이와 새 커피 한 잔이었다. 처음엔 유현이가 나를 위해 새로 한 잔을 주문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카페에서 준비해 준 커피였다. 커피 컵에 물을 붓고 있는 유현이의 등 뒤로 ‘커피 나왔습니다’라는 말이 들렸다고. 당연히 다른 손님의 커피라는 생각에 별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던 유현이도, 안내하는 점원과 재차 눈이 마주친 뒤에 그것이 나를 위한 새 커피였단 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빨대 구멍도 못 찾은 내가 너무 얼뜨기처럼 보였던 걸까. 그래서 남은 커피나 홀짝 대던 내 모습이 불쌍해 보였던 걸까. 어쩌면 그동안 수많은 진상들을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잘잘못과는 별개로 카페 안에서의 발생한 모든 우연과 실수를 카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니까.

나는 내가 그런 류의 진상 손님으로 보인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잠시 부끄러워졌다. 해서 다시 가게로 들어가 고맙다 인사하는 대신, 카페를 피해 되도록 멀리 달아났다. 산책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카페를 지나가야 했으나, 굳이 맞잡은 유현이의 손을 놓아버리면서까지 카페 앞을 빠르게 지나쳐 버렸다. 그런 나를 보고 유현이는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단 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내가 왜 이러는지 자세히 설명하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도, 다시 카페로 들어가 신경 써주셔서 고맙단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후회스럽다. 점원의 작은 친절이 하마터면 엉망으로 마무리되었을 내 하루를 살린 셈이니, 감사 표현을 했어야 마땅했다. 게다가 커피 한잔이 나의 하루 중 포기할 수 없는 행복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컵 바닥에 남은 커피 몇 모금으로 점심을 마무리했다면, 오늘 하루는 기분이 영 별로였을 것이다.

삶이 퍽퍽하고 힘들단 이유로, 어느덧 작은 친절을 앞에 두고도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고작 그런 것을 어려워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 보기에도 미덥지 않다. 도움을 받으면 즉각 고맙다 말할 수 있는, 마음을 표현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고 싶다. 진심 앞에 머뭇거림 없이 단호한 사람, 애써 꺼내 놓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단단한 진심이 물씬 묻어 나는 사람이면 더욱 좋겠다. 그럼 사람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진다.

집에 돌아와 다시 상상해본다. 그때 내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 점원 혹은 사장님의 눈을 바라보며 ‘제 실수인데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했으면 어땠을까. 생경하지만, 상상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장면이다.

새로 받은 커피의 맛은 어쩐 일인지, 처음 마셨던 커피 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그것이 단지 기분 탓 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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