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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Sep 20. 2024

쌍둥이로 산다는 건

나란히 밤길을 걷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휘적휘적 비슷한 걸음을 걷는 우릴, 친구 희윤이 찍어주었다. 20년 지기가 보기에도 재밌는 광경이었나 보다.

지금만큼 쌍둥이가 흔치 않던 학창 시절이었다. 마르고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볼만 불타듯 빨갛던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 아무래도 눈에 띄었을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먼저 말을 걸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만 잘해주다 보면 어느새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친구 사귀기에 이보다 효과적이고 쉬운 방법이 있을 리 없지만, 그 탓인지 나는 아직도 먼저 말을 걸며 다가가는 데에 서툴다. 사교성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사전에 박탈당했기 때문일지도.

받기만 하는 일방적 관심에 다만 아쉬운 건, 언제나 쌍둥이에 관한 궁금증은 마치 절대 오르지 않는 과외비 30만 원처럼, 30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단 사실이다. 그 최초의 호기심을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도무지 창의력이라곤 결여된 뻔해 빠진 질문이 대다수라, 평생 비슷한 레퍼토리를 반복하다 보니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고픈 마음이 들기도 전에 지치고 만다.

누가 형이야? 몇 분 먼저 태어났어? 텔레파시 통해? (처음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는 한편, 순수함에 자못 귀여워 웃음이 나곤 한다) 한 명이 아프면 다른 한 명도 아파? 어떻게 구분해? 그거 알아? 미국 혹은 캐나다에선 먼저 태어나는 사람이 동생이래.

대부분의 질문엔 이미 정교화된 모범답안이 존재하지만, 둘을 어떻게 구분하냔 물음은 내게 조금 특별해서 왠지 성의 있는 답변을 해주고 싶어 진다.

비슷하다 생각되는 두 개를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둘의 차이를 발견하려 애쓰며 틀린 그림 찾기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과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혹은 관계를 쌓아 소중해지는 것이라고.

나의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전화 목소리로도 우릴 구분해 내는 센스 있는 친구들은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쳤던 것 같다. 한 명을 오래 두고 사귀며 표정, 말투, 얼굴에 익숙해지고 그러다 다른 한 명을 보면 대번에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학습의 과정을. 그렇게 본다면 그들의 센스를 그저 센스가 아니라 애정과 관심으로 치환해도 좋지 않을까.

이상하게도 함께일 때면 우릴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고, 나는 이제 그걸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모름지기 쌍둥이란 친구도 형제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를 아득히 초월하여 존재하는 특별한 관계라 생각한다.

친구도 형제도 아닌, 어쩌면 둘 모두인 관계. 그런 사람 하나 가지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쌍둥이가 아닌 그들은 절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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