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피아노 뚜껑을 여는 순간

쇼팽 프렐류드 1번 - 모든 연습은 이 곡에서 시작된다

by Dami

피아노를 친 지 반세기가 넘었다.


하지만 어릴 적 피아노를 시작할 때에는

피아노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


동네에 피안노 학원이 생겼고,

유치원을 보내지 않으니

소리 나는 저 학교라도 보내 달라고

며칠을 엄마에게 졸라 시작된 일이었다.


다섯 살에 피아노를 시작한 뒤로

나는 건반보다 먼저 노래로 사람들 앞에 섰다.

초등학교 입학 전,

나는 이미 동네에서 꾀나 유명한 결혼식 축가 가수였다.

피아노 선생님이 반주를 맡으실 때마다

내 손을 잡고 함께 가 축하를 부르게 하셨다.


그러다 몇 해 지나

제법 건반에 손이 붙었을 무렵,

열다섯 살 위 언니의 결혼식에서

직접 반주를 맡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의 피안노 인생은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주변의 모든 결혼식 반주는 내 차지가 되었다.

결혼식 반주 (초 4학년)


노래를 한 번 들으면

악보 없이도 바로 피아노로 옮길 수 있다는 걸

주변에서 알게 되자,

집안 모임이 있는 날이면

가라오케 대신 내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울고 넘는 박달재〉부터

〈돌아와요 부산행에 까지,

요청은 제 각각이었고

장르도 가리지 않았다.


체르니 30, 40, 50, 60을 전부 끝냈을 즈음,

아직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에게

선생님은 교수님을 찾아가 보라고 권하셨다.


이제는 배토벤과 쇼팽, 리스트를

제대로 배워야 할 단계라며,

본인이 가르치기에는

조금 벅찬 학생이라는 말도 함께 덧붙이셨다.


전공을 시킬 생각이 전혀 없던 엄마도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섰고,

초등학생은 받지 않는다던 교수님은

지인의 부탁으로

딱 한 번만 보겠다고 못 박으셨다.


그런데 그날 이후,

그 못과 상관없이

나는 그분의 애제자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여정은

부산에서 미국으로,

다시 러시아까지 이어졌다.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했지만

피아노는 여전히

가장 좋아하면서도

가장 하기 싫은 일이다.


매일 같은 곡을 반복하고

연습 위에 연습을 더해야 하는 일.

가장 예민한 감수성과

가장 긴 지구력을 요구하는 길이

전공자의 삶인 것 같다.


50년을 연습해 왔지만

자신 있게 남 앞에서 칠 수 있는 곡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지금도 나를 가장 힘들게 한다.


악보를 보고 못 치는 곡은 없다.

매일 연습도 한다.


하지만 마음에 들게

완성되었다 말할 수 있는 곡은

끝내 단 한 곡도 생기지 않았다.


어느 날은 음이.

어느 날은 느낌이

어느 날은 페달이 마음에 걸린다.


이제는 연습을 해도

집중력은 떨어지고

실수는 점점 더 늘어만 간다.

눈도 침침해 건반이 흐릿하다.


가만히 있어도 실력이 주는 나이가 아니라

이제는 연습을 해도 실력이 주는 나이가 되었다.

이러다 한 곡도 제대로 치지 못한 채

피아노 뚜껑을 닫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생겼다.


그래서 올해부터

한 달에 한 곡씩 외워보는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첫 곡이

쇼팽의 프렐류드 1번이다.


30초 남짓한,

아주 짧고 담백한 곡이다.

연주를 시작 전

수줍고 떨리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오듯,

왼손과 오른손의 엇박이

그대로 음악이 된 곡


프렐류드라는 이름처럼

이 곡은 언제나 내 연습의 문을 연다.

대단한 준비를 욕구하지 않는다.

너무도 짧아

시작과 동시에 끝이 찾아오는 곡.


그래서 이 곡이

지금의 나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짧은 30초를 위해

평생을 연습해 온 사람처럼.


완성은 늘 다음으로 미뤄지고,

연주는 늘 부족하다고 느껴

정작 녹음은 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시작과 함께 끝이 나 버린 연주.


그래도 나는 여전히

피아노 뚜껑을 연다.


오늘도 이 곡으로

연습을 시작한다.


아직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지금도 떨림을 안고 연습한다.



녹음 비하인드 스토리는 네이버 블로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pianomusium?Redirect=Write&categoryNo=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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