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한 장의 악보에 담긴 스물일곱 장의 연서

흔들리는 리듬, 지나간 마음

by Dami

2월, 무르익은 고백 대신 서투른 사랑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가끔 내 손끝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헤맬 때가 있다. 이번 2월이 그랬다.


애초에 마음먹었던 곡은 '사랑' 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클라라 슈만을 향한 고결한 사랑이 담긴 브람스의 '인터메조(Intermezzo)'였다.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연모하며 묵묵히 그 곁을 지켜온 브람스의 사랑은, 마치 오래 우려낸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향기처럼 묵직하고도 숭고해, 그의 깊은 고독과 헌신을 연주하며 이 사랑의 계절을 지나고 싶었다.


하지만 2월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마음이 머뭇거리며 변덕이 일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의 결이 달라진 탓일까, 아니면 밸런타인데이의 달콤한 분위기에 속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서툰 설렘이 그리워진 탓일까. 다 익어서 발효까지 이룬 사랑의 깊은 무게보다는, 싱그럽고 풋풋한 사랑의 선율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브람스의 깊은 사랑을 아껴두고 꺼낸 곡이 바로 에니오 모리코네의 'Playing Love'다.


불규칙한 비트가 만든 찰나의 선율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속 주인공 '1900'은 미국으로 향하는 거대한 유람선, 그 화려한 연회장 피아노 아래의 사과상자 안에서 발견되었다. 배 안에서 아이를 낳고 숨을 거둔 어머니, 그런 아이를 홀로 키울 길이 없었던 가난한 이민자 아버지가 차마 데려가지 못하고 사과 상자 속에 아이를 남겨두고 떠났다.


이름도, 국적도 없이, 발견된 해를 뜻하는 숫자 '1900'로 불리게 된 그는, 그렇게 배 안의 세상에 갇혀 홀로 남겨졌다.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세상과 유일한 탯줄이 끊겨버린 그는, 육지의 흙을 밟을 수도 배 밖으로 떠날 수도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렇게 유람선 '버진(Virgin)'호는 그에게 요람이자 무덤이 되었고, 그는 평생을 파도 위에서 유랑하며 살았다.


배 안이 세계의 전부였던 그에게 사랑이란 한 번도 닿지 못한 미지의 대륙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오직 음악만을 유일한 놀이 삼아 자신만의 견고한 성을 쌓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창틀 너머로 한 소녀가 빛줄기처럼 스쳐 지나간다.


찰나의 순간, 견고하던 그의 세계에는 여지없이 균열이 생긴다. 건반 위에서 방황하던 그의 손가락은 의지보다 먼저 움직여 하나의 곡을 길어 올린다. 예고 없이 찾아온 사랑의 울렁임과 멈출 수 없는 감정의 당혹스러움이 선율이 된 'Playing Love'

https://youtu.be/MUIgReYNMac? si=thmp2 pv55 vX_Ogfu



낯설게 일렁이는 생경한 7/8박자의 고백

이 곡은 누군가에게 빨려 들어가는 감정의 혼돈을 마디마다 바뀌는 박자표로 그려낸다.

4/4, 3/4, 4/4, 7/8... 마디마다 옷을 갈아입듯 바뀌는 박자표는, 서툴고 불안하게 뛰는 사람의 심장 박동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특히 낯설게 일렁이는 생경한 7/8박자이 곡의 백미다.


내 안에 누군가 훅 들어왔을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은 설렘과 동시에 찾아오는 불안한 일렁임을, 3+4 혹은 4+3이라는 어디에도 딱 맞지 않는 조각을 품은 7/8박자가 아슬아슬하게 리듬을 흔들며 끌고 간다. 그것은 마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기 전, 제 갈 길을 몰라 서성이는 우리의 서툰 마음을 닮아 있다.


템포 역시 내 의지를 배반한다.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그녀라는 중력에 이끌려, 손가락은 나도 모르는 사이 제 길을 찾아 움직이고, 연주자는 어느새 주도권을 내려놓는다. 관심과 설렘 사이를 오가며 미세한 감정의 떨림을 담아내기 위해, 나는 오늘 이 곡의 박자 하나하나에 스며든 불안함을 조심스럽게 내 손끝에 녹여본다.


반세기의 시간을 건반과 함께 살며, 첫사랑의 싱그러움은 잊은지 오래다. 옛 기억을 더듬어 보려 해도, 손끝에는 자꾸만 삶의 옹이가 박힌 투박한 감정선이 묻어난다. 세상의 시간을 통과하며 닳아버린 몇 장 없는 추억을 들고 억지스레 회상하듯 오프닝을 지나노라면, 충분히 애틋해 보지 못한 나의 청춘을 뒤로한 채 곡은 어느새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너무 빨리 찾아온 클라이맥스에 어찌할 바를 몰라 건반 위를 서성이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구간에 이르러 쓸쓸한 작별을 건네게 된다.


연주는 연주하는 사람의 성품과 인생을 소리로 드러낸다. 내가 남긴 2월의 이 연주 또한 어쩜 이리도 나를 닮았는지…


사랑임을 알았으나 끝내 잡을 수 없었던 배 위의 피아니스트처럼, 나의 연주 또한 수줍은 자책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곡 자체가 워낙 수려해, 그저 이 선율에 몸을 맡기고 손가락을 따라가 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비록 내 손끝은 삶의 무게 앞에서 갈팡질팡할지언정, 27마디마디 저마다의 사연을 담아 스물일곱 장의 연서를 써 내려간 모리코네의 마음만큼은, 잠시나마 닮아보고 싶다.


https://youtu.be/cCgA8oRV1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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