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두 엄지 손가락이 속삭이는 삶의 본질

루빈스타인 ’F 장조의 멜로디‘

by Dami

봄의 기운이 움트는 3월, 내가 선택한 이 달의 곡은

러시아의 피아노 거장 안톤 루빈스타인 (Anton Rubinstein)의 F 장조의 멜로디 (Melody in F)다.


1852년, 스물셋의 젊은 루빈스타인이 세상에 내어놓은 ’두 개의 멜로디‘라는 세트 중 첫 번째 곡.

'두 개의 멜로디'로 묶음 출판된 악보


루빈스타인은 당대 ‘피아노의 왕’이라 불리던 리스트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였다.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 ‘리스트’

베토벤과 매우 닮은 외모 덕분에

‘베토벤의 환생’이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화려한 명성 뒤에서 정작 본인은 연주자가 아니라

베토벤 같은 작곡자로 기억되길 갈망했다고 한다.

왼편: 베토벤 / 오른편: 루빈스타인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을 세워,

차이코프스키라는 걸출한 제자를 길러 낸

교육자로도 유명했다.

루빈스타인이 세운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 세인트 피터스버그 국립 음악원
루빈스타인의 제자였던 차이코프스키



고독한 이방인이 건반 위에 남긴,

가장 부드럽고도 깊은 멜로디


루빈스타인은 생전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매우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방황했다고 한다.


나는
러시아인에게는 독일인 같고
독일인에게는 러시아인 같다.

유대인에게는 기독교인 같고
기독교인에게는 유대인 같은
존재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이방인의 고독.

스물세 살의 젊은 청년이 느꼈을 그 쓸쓸하고 공허한 정서가 바로 이 곡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분명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이지만, 그 이면에는 왠지 모를 우울함과 쓸쓸함이 깊이 깔려있다.


마치 3월의 햇살 속에서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겨울의 찬 공기가 남아있는 것처럼.



삶의 본질을 잃지 않는 법을 엄지로 노래하다.


이 곡의 백미는 화려한 기교가 아니라 연주 방식에 있다. 양손의 엄지 손가락이 번갈아 가며 멜로디를 이어나간다. 나머지 손가락들은 그 선율을 받쳐주 는 아르페지오와 코드 역할을 할 뿐이다.

피아노 앞에 앉아 이 곡을 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주변의 장식음들이 하프처럼 드르렁~ 거리며 화려하게 긁고 지나갈 때, 그 소리에 현혹되면 어느 순간 엄지가 주고받던 멜로디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아래의 악보를 보면 알겠지만, 멜로디는 가끔씩 나오는 한 음뿐이며, 나머지는 전부 멜로디를 받치는 화음이다.)

복잡한 코드와 멜로디가 함께 나와 구분이 힘들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늘 말한다.

바쁠수록 하나에만 더 집중하라 ‘고


인생도 마찬가지다.


공부의 목적은 잊은 채

성적과 대학이라는 화려한 장식만 쫒거나,

행복의 본질은 잊은 채 돈이나 명예 같은

복잡한 코드 진행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삶의 멜로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양손의 엄지 사이를 오가는

단 하나의 음에 더 집중을 해야 한다.



삶의 하모니를 완성하는 균형의 미학


멜로디를 주고받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멜로디와 다른 하모니의 조화로운 균형이다.


멜로디에 힘을 너무 주면 소리가 튀고,

힘을 너무 빼면 흐름이 끊긴다.


삶도 비슷하다.

일에만 치중하면 건강과 가족을 잃고

공부에만 몰두하면 친구와 추억을 잃고

돈과 성공에만 몰두하면 나 자신을 잃는다.


루빈스타인이 그 고독 속에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슬픔과 기쁨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지켜냈기 때문일 것이다.



3월 나의 중심을 누르는 단 하나의 음


건반을 바삐 오가는 열 손가락 사이에서

오늘도 단 하나의 멜로디에 집중하고 귀 기울인다.


왼손과 오른손을 오가며 이어지는 그

조용하고 부드러운 선율.


3월, 새로운 시작의 달.

나의 삶이라는 악보 위에서

가장 중요한 멜로디는 무엇일까?

그 멜로디를 잊지 않고 잘 따라 흘러가고 있는가?


주변의 화려한 장식음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단 하나의 선율을 따라가면 된다.


불꽃같은 연주자보다 고독한 작곡가로

사람들 곁에 남기를 원했던 루빈스타인처럼,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

내면의 조용한 하모니를 완성하는

3월이 되기를 희망한다.



전곡연주는 아래의 링크를 누르세요.

https://youtu.be/d5x0 LyapNoQ



매거진의 이전글2월: 한 장의 악보에 담긴 스물일곱 장의 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