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와 나 01
흰머리와 사노 요코와 옆집 할머니_2017 가을
흰머리를 뽑았다.
가끔씩 햇빛이 좋은 날 볕이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그동안 들춰보지 않았던 머리카락들 속에서 흰머리들이 반짝반짝한다. 그러면 날을 잡고 다리가 저려올 때까지 어깨가 뻐근할 때까지 족집게를 들고 흰머리를 뽑는다.
물려받은 유전자 덕분으로 피부는 깨끗한 편이고, 몸매는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잠시 극심한 다이어트를 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평생 비슷한 펑퍼짐한 몸매였다. 그래서 나의 나이 듦을 확인하는 가장 큰 징표는 흰머리이다.
하나하나 흰머리를 뽑으며 왜 이렇게 많나, 왜 벌써 이렇게 희어지나 생각한다. 어쩌면 깨끗한 피부와 더불어 하얗게 세는 머리카락 유전자까지 물려받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흰머리는 싫다. 나이가 드는 것이 싫은 건 아니다. 몸이 나이가 들면 그만큼 생각도 나이가 들지 않는 것이 싫은 것이다.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세상사에 밝지도 못하고, 집을 사거나 노후를 준비하는 것은 어른들이 해야 하는 복잡한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마냥 천진난만하게 누군가의 동생이고 후배이고 젊은 새댁인 채로 있고 싶다. 언젠가는 그런 것들을 해야 하고 알아가야 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란 말이다. 아직은 아니고 싶다는 말이다. 하지만 흰머리는 그런 생각들을 해야 할 나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작품 구상을 핑계로 추리소설을 손에 땀을 쥐며 밤새 읽거나, 하루 열 시간씩 며칠이고 미드를 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작품을 핑계로 노는 법만 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고 작가가 되면 이런 게으름은 피울 수 없게 되겠지. 아니면 저절로 싫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사노 요코의 수필집을 읽으며, 작가의 문장이 이렇게 편안하고 안정적일 수 있나 싶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 한줄한줄이 모두 작품인 것만 같다. 이런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약이 오른다. 삶 자체가 작품이고 작품이 삶 자체인 것만 같은 작가들은, 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 티비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육이오 전쟁 당시에 학살을 당한 보도연맹 가입자들의 유골이 대량으로 발견된 현장에서, 그나마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유해가 있었다. 그 유해를 분석하기 위해서 한 법의학자가 나왔다. 이 사람이 입은 양복이나, 팔다리에 근육이 별로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문직이나 고위급 인사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죽어서까지 흔적을 남기는구나, 생각하니 역시 동물에게는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인 모양이다.
나로서는, 하루 종일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을 때가 많아서 일부러라도 몸을 움직일 생각을 해야만 한다. 죽어서 내 몸을 보기만 해도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창피함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다. 이 사람은 정말 게으른 삶을 사셨군요, 하루에 백 걸음도 걷지 않았을 것입니다. 작가나 뭐 그런 직업이었겠네요.라고 말이다.
항상 몸을 움직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넘어 경외감 같은 것이 든다. 뭐라도 한 문장을 써보겠다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내 주위로 모든 사람들은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있다. 우체부, 택배 배달원,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 미화원, 식당, 슈퍼의 노동자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있다. 옆집의 할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 오백 평이 넘는 텃밭을 혼자 일군다. 콩이며 고추며 깻잎까지 없는 게 없는 할머니의 밭에서 나는 감자와 토마토, 가지를 얻어먹는다. 할머니 말로는 이 밭을 일구느라 정작 이 밭에서 나온 채소를 먹을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새벽에 일어나 움직이고, 손주 밥을 챙겨주고, 한숨 돌리고 나면 또 오후에는 집안일이나 다시 텃밭을 가꾼다. 정말로 움직이는 일에는 끝이 없다. 손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그리 정정하다는 것은 몸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몸과 비교해보자면 얼마나 고귀한 육체인가 생각하게 된다. 내 몸을 움직여서 내가 할 일들을 해낸다, 이 단순한 문장이 나에겐 굉장한 죄책감을 주고 있다.
억지로라도 조금씩 몸을 움직이다 보면 묘한 희열감 같은 것이 있다. 설거지를 하거나 집안을 닦고, 빨래를 하고, 마당에 풀을 베고 있자면 몸의 움직임과 노동이 주는 편안함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날은 나도 부끄럽지 않구나,라고 스스로를 조금은 위로할 수가 있다. 블루 칼라가 뭐고 화이트 칼라가 다 뭐란 말인가. 나는 정말로 육체를 움직이는 직업이야말로 고상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고작 한 줄의 마음에 썩 드는 문장을 써놓고 굉장한 일을 해낸 것처럼 자부심을 가지는 나란 인간은, 하루에도 수백 건의 물건을 배달하는 저 택배 배달원의 땀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은 사람인가. 세상과 자연에 직접 부딪혀 내 몸으로 일을 해나가는 노동자들에 비하면 고작 작은 책 한 권 뒤에 숨어 이러니 저러니 머리만 굴리고 있는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시답잖은 사람인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나의 말 한마디가 아니라 몸소 부딪혀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곳도 나름 시골이고 나름의 전원주택 타운이 되어있다. 어느 연예인이 투기를 해서 재미를 좀 봤다더라, 하는 말들을 듣고 있자면 이 땅이 농락당하는 것 같다. 누구의 땅이고 누가 주인이기에 이 땅은 얼마의 값어치라는 가격표를 달고 존재하는 것인가. 신이 있다면 코웃음을 칠 일이다. 그리고 정말 신이 땅을 나누어 준다면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옆집 할머니가 될 것이다.
2017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