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할머니 인터뷰_2019 1월
나의 친할머니는 기미년 1919년에 태어나셨다. 그리고 2016년도에 돌아가셨다. 백 년에서 이 년을 못 채우고 돌아가신 것이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성당을 다니고, 가벼운 집안일도 하시고, 소고기나 회도 잘 드셨다. 티비에서 보는 백세 장수의 비밀 같은 다큐멘터리를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할머니는 팔십 대에 평생을 다닌 절을 그만 다니기로 하셨다. 그리고 천주교로 개종을 선언하셨다. 구십 대에는 '내가 죽은 후에 제사를 그만 두어라'고 하셨다. 나의 큰어머니, 할머니의 큰며느리는 오십 년 가량 제사를 지내왔다. 전을 부치고, 고기찜을 만들고, 생선을 굽고, 잡채와 국 외 수많은 요리를 꾸준히 해왔지만 할머니의 개종과 제사 중지 선언 한 마디로 평생 해오던 일을 멈추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큰어머니는 앞으로 삼 년간 해오던 대로 제사를 이어가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할머니의 유언은 삼 년 후부터 지키는 것으로 유예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를 무서워했다. 그래서 명절마다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다. 여자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음식을 하고, 주방을 치우고, 음식을 나눠 담고, 남자들은 절을 하고 윷놀이를 했다.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친척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차별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반찬 선택권, 심부름의 빈도, 칭찬 횟수의 차이 등등. 그 아이는 그때 내가 그렇게 느꼈던 것을 알고 있을까? 자신은 어떤 것을 느꼈을까.
그래서 할머니를 비롯한 모든 친척 남성들이 밉고 싫었다. 그때는 남아선호 사상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지배적인 가치관이었다. 국민학교 세대인 나의 교실에는 항상 남학생이 열 명 이상 많았다.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 아니, 왔다가 금방 돌아가셨다고 했다. 계모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커가면서 '네가 남자였어야 했다'는 말을 일 년에 꼭 한 번은 들어왔다.
나의 할머니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온전히 겪으며 살아오셨다. 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에 태어나서 촛불집회가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해에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그때 나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주제로 초등학교 고학년을 위한 창작 동화를 쓰고 있었다. 책이나 영화로는 깊이 있게 주제에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할머니를 인터뷰하기로 결심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내가 녹음한 할머니의 음성은 생전의 마지막 것이 되었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눠보자, 할머니라는 사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밉고 싫었던 마음도 조금 사라진 것 같았다. 우리 세대와 너무 다른 젊은 시절을 살아온 어른들을, 단순히 답답하고 권위적이고 꼰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젊은 시절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 빨갱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육이오가 저거하고 나서 나중에 일사후퇴 때 돌아올 거 아냐. 그땐 다 피난 나갔지. 안 나갈 수 없잖아. 그땐 경찰들도 다 나가고. 나갈 때는 느 아범은 큰고모가 업구, 막내 고모는 이 등이 이런 게(막내 고모는 다섯 살 때 사고로 척추가 펴지지 않는 장애가 생겼다) 일어서질 못했으니까 내가 업고, 할머니는 돈이고 피륙이고 그런 거 전부 차고, 할아버지는 돗자리 무슨 뭐 해서 또 한 짐 지고, 애 보는 애가 있었어. 걔가 또 하나 업고. 기찻둑으로 가는데 엄마 고만 가, 엄마 고만 가, 그래. 가다 보면은 요만한 포대기에다가 애를 갖다 앉혀놓은 것도 있어. 앉혀놓고 저희들만 간 거야. 그래 내가 그 가다가 벼락 맞는다고. 벼락 안 맞을까. 어떻게 제 자식을 놓고 가. 그런 것도 있었어. 그래 걔는 누가 데려가지 않으면 거기서 죽을 거 아냐.
그래 가다가다가 기찻길로 가는데 밤이 돼서 동네가 없고 기찻둑에서 자는 거야, 이제. 근데 가다 보면은 이불이고 뭐고 내버린 게 많아. 가지고 가다가 내버리는 거야. 그걸 큰아범하구 큰고모하구 둘이서 가서 죄 주서다가 기찻둑에다 깔고 덮고 돗자리 왜. 아침에 일어나니까 돗자릴 일으킬 수가 없어. 눈이 와가지구. 이만큼이 빠져. 그런 델 헤치고 가. 참 그때 고생 많이 했어."
"그리고 낮에 되면은 우리 또 가구. 과천 산을 넘어서 평택까지 가는데, 가는데. 빨갱이들이 홑이불 하얀 홑이불 있지, 그걸 뒤집어쓰고 와. 그럼 하루 종일 걸어가다 보면 밤에 가면 그놈들 만나. 근데 우리한테 해치지 않아. 그 빨갱이들이.
이렇게 하기를 평택까지 갔어. 그 평택 가서 더 못가겠드라. 그래 그 평택 촌에 들어가서 살다가, 사는데. 미군들이 저 전진해 들어오면서 더 내려가지 말라구. 여기 있다가 우리가 다 들어가면 쫓아 들어오라고. 그러고는 그때에 그 미군들이 느 아범을 큰고모가 업구 나가잖아. 업고 나가면 느 아범이 어려서는 허옇게, 허얘가지고 이뻤어, 여자같이.
이쁘니까 군인들이 드미다보고 이쁘다구 만지면서 칸소메, 칸소메(인스턴트 음식 등으로 추정된다) 하꼬(상자) 느 아범을 주구. 난 그걸 또 얻어가지고 와서 먹구. 그때 그 미군들이 빨래를 못하니까. 우리더러 빨래를 해달라고 해서 빨래해서 말리지도 않고 그냥 젖은 거 줘. 그러면 또 이만한 하꼬(상자)로 하나씩 먹을 걸 들여보내 주고. 그렇게 해서 살았어. 미군들헌테."
"아유, 그래서, 난중에는 육이오 끝날 때 돼서 나갔는데, 너 할아버지가 병이 나니, 느 아버지의 아버지. 어떡할 수가 없어 대구로 내려 보냈지. 이모할머니가 대구로 내려가 있으니까 거기 가가지구서 병원에 있구. 그 우리만 인제 피난 댕기다가, 나중에 군인들 다 들어가니까 쫓아 들어오는데, 하여튼, 이렇게 가다가 보면은 집에 들어가면 쌀이고 뭐구 먹을 게 수두룩해, 빈집이. 피난 나간 거야. 그거 먹으면서 들어왔어. 그래 들어와가지구 강을 건널 수가 있어? 그때는 강 건너야 들어오는데 강을 못 건너구 그러니까 영등포지, 지금으로 치자면 영등포 거기서 인제 있는데.
나중에는 할 수 없어서 거기서 먹을 거 있니 뭐 있니 그래서 저 뭐야, 큰고모하구 느이 큰아버지하구 또 먹을 거 얻으러 찾으러 댕기는 거야. 그래서 쑥개떡, 쑥개떡을 많이 먹었지. 쑥을 뜯어다가 그렇게 하구 들어오는데 들어올 수가 없어. 강을 건너는데, 강 건너서 저 뭐야. 농사짓는 사람들은 먼저 들어갔어. 근데 우린 농사짓는 게 없잖아? 그래서 나가서 또 거리에 나서니 서대문 구청이 있는 사람들이 나와 섰어. 그러니까 또 얼마나 반가우냐. 그래서 들어왔지 또. 그래 아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랬어(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경찰을 숨겨주었다). 그래 들어와 가지고 집에 들어와서 있으면서 저, 능금, 옛날엔 능금이 있었다, 사과 쪼그만 거. 그 능금 해가지구 영등포 갖다가 팔면은 두 배 남어. 그래 그거 팔아가지고 들어와서 그거 가지고 연명해가지고 살았는데, 집이 내버리고 간 거는 다 없는데.
내가 뭐냐면, 화초 밭에다가 독을 넣고, 독 속에다 재봉틀하구, 뭐 저 중요한 거 넣어 놓고선 거기다 나무를 심어놨어. 그러니까 그건 안 파가구, 다른 건 죄 가져가고 없어. 여 피난 안 나간 사람들이 죄 가져갔지."
"그래 할아버지가 병이 나니까 대구로 내려 보냈다가 또 서울로 들어왔어. 서울에서 약을 헐 수가 없으니까 그 능금 해가지고 팔아가지고 영등포서 약 지어가지고 오고. 느 할아버지는 그렇게 그때부터 병들어가지구서 팔 년 만에 세상 뜨셨어. 그렇게 내가 고생했다, 야.
그러니깨, 무슨 병이냐면, 팔일오 해방 때, 해방 때 우리가 양복점을 했거든? 양복점을 하는데, 양복점이 해방이 되니깐, 죄들 와가지구선 무조건 가져가, 무법천지야 그때는. 그래 가지고 총대고 칼대고 하구서 그 양복 있는 걸 전부 다 가져갈 때 그때 놀래가지구. 머리가 멍해져가지구. 그때 놀래가지구. 그때 정말 총 맞는 줄 알았지.
도둑놈들이지, 말하자면. 저 지금 거기 뭐라 그러니, 이불 넣는 거 이만한 거 있잖아. 그걸로 셋을 가져갔어. 해놓은 걸. 그러니 해놓은 걸 가져가니 주문 맡아서 한 건데 그걸 찾으러 올 거 아냐. 그러니 찾으러 오니 어떡해. 그러니 할아버지가 반씩은 다 물어줘야 하니 집 팔아서 다 물어준 거야. 그때부터 망한 거야, 우리가. 저 옛날에 서대문 동양극장 건너짝에 금천 양복점이라고 컸어. 크게 됐었어.
그래서 집 팔아가지구 다 물어주고. 그러더니깐두루 정신 이상이 되어버리더라. 그러니까 멍하니, 하는 병이 된 거야. 그러니까 멀건이가 된 거야."
"일제시대 때는 우리는 양복점하구 잘 살았지, 일제시대에는."
"그건 저 뭐야, 미군들이 그랬지. 미군들이 그랬어. 미군들이 와가지구, 빨갱이들 붙잡아가지고 빨가니 벳겨서 아무것도 안 입히구서 옷을 이렇게 머리에 해서 조리를 돌려. 그래 다 돌려댔어. 그래 가지고 목욕탕에다 다 집어넣더니 그거 다 나중에 총살시켜서 죽이드라. 행길 옆에다가 구데기를 팠어. 거기다가 다 갖다 집어넣더라. 그러니까 미군들도 너무 잔인하게 했어. 사실은. 그걸 어떻게 목욕탕에 넣구 다 총살시키니. 응. 빨가니 벳겨, 아무것도 안 입혀. 그래가지구 머리에다가 이래 두 손 올려가지구 조릴 돌린 거야. 댕기면서 다. 그러니까 다 나와서 구경하다가 들 들어가구. 그 야단들을 했지. 그 지금 아마 저이, 목욕탕 건너짝에 큰 화장실이 있었는데 화장실 옆 동에 땅을 깊이 팠는데 거기다 다 묻어놨는데. 그 죽은 걸. 묻었는데, 난중에 저 뭐야. 그 어떻게 했는질 모르겠어. 난중에. 거 묻는 거만 우리가 알았지. 거따 다 집어넣어놓고 흙 덮어놓고 흙 덮어놓고.
그 뭐, 뉘 집 자식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어, 들. 모두. 아유, 그때 뭘 그걸 구경을 하러 나갔었는지 몰라, 우리가.
빨갱이들 그 목욕탕에 넣고 죽였는데 끌어내 오는 거 보니까 다 이렇게 했드라, 이렇게 했어(양 손을 주먹을 꼭 쥐고 가슴 앞에 모은 모습을 해 보이셨다). 다 악에 받쳐서 죽었는가 보드라. 총 맞을 때. 그래 그거 구경한다고 갔었어."
"야, 육이오 때는 자고 일어나니까 이 집도 빨갱이, 저 집도 빨갱이, 죄다 빨갱이드라, 게 빨갱이가 있는지도 몰랐지. 아유, 그래 가지고 참, 증말.
빨갱이들 틈에서 우리가 살았어. 느 아범 그때가 세 살인가, 세 살인가 두 살인가.
우리 집이 요롷게 골목에 들어서면 막다른 집이야. 더 이상 나가지 않는 집. 막다른 집. 그래서 요기 나가서 앉아서 동네가 있는데 거기 앉아가지고 아범 젖 멕이고 앉았고. 너희 큰 고모가 집에 사람 둘 숨겨놓고. 그이가 외삼촌네 아들이고 그러니까 사촌의 오라버니지. 또 너희 할아버지 친구 양주 서장하고, 또 하나는 강화 교동 지서 주임이고. 경찰 둘을 숨겨놨으니 빨갱이들이 나서면......
고 앞에 집에 군인들 둘 숨겼다가서 다 내다 놓고 총살로 그 집 식구고 군인이고 다 죽이더라. 그래서 너희 아범하고 저기 저 남매들 다 봬줬지, 그 죽이는 거. 아저씨 여 있다고 누가 물어보면은, 없다 그래라, 있다 그러면 다 저렇게 죽인다. 그래서 일부러 나가서 뵈줬어. 지금 그때 생각하면 기가 맥힌다."
"그거는 밤에만 뒤지러 댕겨. 사람 숨겨 놓은 걸. 밤에만 뒤져. 우리 집이 막다른 집인데, 반장더러 나는 잠귀가 어두워서 못 알아듣는다고, 얼른. 그러니 대문 막 흔들라고. 얼른 못 나간다고 이래 놓고.
안방에는 두 사람 숨겨놓고, 우린 건넌방에 있고 그래 앉아가지고 대문 저, 교대로 잠자지. 그냥 다 못 자. 교대로 자야지. 그래 그 사람들이 오는 거 같으면 숨겨놓는데, 한 번은 지붕으로 올라가고, 한 번은 장롱 뒤에다가 요렇게 장롱을 조금 끌어내 놓고는 장롱 뒤에 놓고는 이불 싸서 이불 넣으니까 뒤에 숨어있을 거 아냐. 그런데 와서 장롱 문을 열더라, 그러니 그 뒤에서 숨소리가 나면 어떻게 되니. 그러니까 네 아범을 젖먹이다가 말고 꼬집었지, 그러니 왁-하고 울잖아, 그러니까 그 숨소리를 못 듣고 나갔지. 그렇게 해서 살렸어. 둘을.
근데 그때 내가 생각을 해도 어떻게 꼬집을 생각을 했는지 몰라. 자는 놈을 꼬집었으니 얼마나 울갔니.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몰라, 그 볼기짝을 꼬집었으니 아유. 그래 가지고 또 모면했지. 앉았다가서 골목에 앉아서 느 아범 젖 멕이고 있다 가서 큰고모 심부름하는 거야. 젖은 기저귀 들여보내면은 바꿔 내보내고. 지금은 기저귀가 없지만 그때는 꼭 기저귀 채고, 그거 빨고 그랬잖아. 그래 마른 기저귀 들여보내믄 다 숨구, 그렇게 암호로 해가지구."
"그래서 그 양주 지서 주임으로 살려놨어. 석 달 열흘 만에 살려놨어. 살아 나왔다고 해서 애들 공부는 내가 가리켜야 된다고, 날 살려놨으니까. 그래서 정말, 공불 가리켜주다시피 했지. 학비를 대주고 그랬지. 날 장살 시켜줬지. 일 년에 쌀을 두 차씩 올려 보내주고. 또 그다음에는 새젓 나올 때 새젓 올려 보내주고. 그래서 그거 팔아가 학비 댔지. 그렇게 해서 오 남매 공불 가리킨 거야."
"그때가 어느 때냐. 육이오 끝나고지. 지나고지. 아유, 죽어버리면 낫겠다 해서 죽어 버릴려고 가니까 안 돼, 죽는 것도 자살하는 것도 어려워. 맘대로 안 돼. 가서 이렇게 물 디미다 보니깐 다섯 얼굴이 다 나와. 내 눈에. 그러니 죽갔드냐. 못 죽지. 나 하나 없어지면 쟤들은 고아원으로 가지. 고아원으로 가지. 그럼."
2019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