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by 담마

다행히 스크린 도어가 소리를 어느 정도 막아주어서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피부를 파고들지는 않았다. 건대입구역. 그녀가 4년째 다니는 회사가 있는 곳이다. 텔레마케터.


‘젠장, 그때 그 제안을 좀 더 강렬히 거절해야 했는데.’


별로 친하지 않던 대학 선배는 앞의 ‘텔레’를 쏙 빼고, ‘마케터’라고만 했다. 지수는 그냥 회사 마케팅팀 직원을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다. 그녀가 그 ‘마케터’가 그 ‘마케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욕 없이는 한 문장도 끝까지 말할 수 없는 사람. 부모님의 가정교육을 친히 걱정해 주는 사람. 중학교 성교육을 친절하게 다시 해주는 사람. 화장실 변기 소리를 ASMR로 들려주는 사람. 놀랍게도 모두 그녀가 일주일 사이에 전화로 만난 인간들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 선배는 자기가 그 직장에서 나가고 싶어서 지수를 추천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수는 그녀의 ‘대타’였던 셈이다.


‘망할’ 그녀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벌 받는 초등학생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던 그녀는 다시 사람들 무리에 휩싸여 지하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역시 빈 의자는 없었다. 그녀는 초록색 손잡이를 잡고 약간 아래쪽을 바라봤다. 졸고 있는 아저씨의 빛나는 정수리가 보였다. 옆자리 여자는 핸드폰을 하고 있고, 그 옆자리 남학생은 과학 교과서를 보고 있었다. 그게 그녀가 지하철을 좋아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10분 동안 아무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자동으로 남들의 시선과 맞춰지는 눈에서 ‘자동’이란 단어를 뺄 수 있다는 것.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정면의 유리창을 봤다. 수십 개의 눈빛 대신에 검은 건물 사이사이에 박힌 불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는 흐릿한 자신의 모습. 핸드폰을 향해 고개를 떨군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고개를 쳐들고 정면을 보는 자신의 모습. 그녀는 사람들의 눈치 대신 오로지 자신의 눈치만 볼 수 있었다.


지하철은 정확히 10분 만에 잠실새내역에 도착했다. 또다시 사람들 한 무리가 문을 통해 빠져나갔고, 지수는 물 위에 떠 있는 나뭇가지처럼 사람들 틈에 억지로 끼워져 나갔다. 플랫폼 구석에 있는 옆으로 긴 의자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을 확인한 그녀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승강장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검은 스크린 도어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있었다.


작은 갈색 핸드백을 뒤지기 시작했다. 작은 정수기처럼 생긴 원통형 플라스틱 조각을 찾아내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는 흡입기의 위쪽을 누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녀의 책가방에는 항상 흡입기가 들어있었다. 흡입기를 본 친구들의 반응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신기해하거나 경멸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 불행히도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녀는 혼자가 되어갔다. 그녀는 항상 친구들과 달라야 했던 자신을 저주했다. 그리고 그 저주는 엄마에게 넘어갔다. 왜 이렇게 낳았는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럴 때마다 엄마의 두 눈에는 형광등 불빛이 더 선명하게 비췄다. 그때부터 봐야 하는 눈치가 하나 더 늘었다.


“바보같이.”


그녀는 사람들이 사라진 계단을 통해 승강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예상대로 거리는 시끄러웠다. 각막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네온사인과 LED 전구들. 고막을 열심히 흔들어대는 말소리와 엔진 소음. 모든 것이 그녀의 뇌 구석구석에 골고루 날아와서 꽂혔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뀐 것을 확인한 그녀의 다리는 빠르게 왕복운동을 했다.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의 딱딱함과 거친 표면이 하이힐을 통해 그대로 척수에 전해졌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CU 편의점을 지나서 차가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 넓이의 골목으로 들어서자, 주변은 조금 조용해졌다. 수많은 담배꽁초와 전단지, 누군가의 허연 침이 떨어진 그곳이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조심스럽게 지뢰밭을 지나 골목으로 더 들어가니 붉은 갈색 벽돌로 장식된 빌라가 보였다. 때가 낀 유리문을 열고, 2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205호 앞에 서 있었다. 청록색 알루미늄 문에 달린 디지털 도어락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불빛이 들어오면서 숫자패드가 보였다. ‘1025’ 고등학생 시절 그녀를 괴롭히던 아이의 수감번호다. 비밀번호로 정한 별다른 이유는 없지만, 다른 숫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천장에서 자동으로 불이 켜졌다. 하이힐을 발에서 떼어낸 그녀는 왼쪽 벽을 더듬어서 스위치를 눌렀다. 쇠숟가락이 유리컵 주둥이에 두 번 정도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거실의 모든 색깔이 켜졌다. 가구는 책상과 책장, 침대가 전부였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많은 가구를 놓을 만큼 집이 넓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자형 원룸의 중간에는 책장으로 둘러싸인 책상이 있었고, 가장 안쪽에는 침대가 있었다. 거실 슬리퍼로 갈아 신은 그녀는 책상에 다가가서 의자에 앉았다. 흰 책상에는 흰 헤드셋을 제외한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헤드셋을 끼웠다. 두 귀는 완전히 덮여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소음은 차단되었다. 두 눈을 감았다. 얇은 눈꺼풀을 통과한 형광등 덕분에 온 세상은 주황색으로 변했다. 그녀는 형광등마저 끄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녀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루의 마지막 한숨이었다. 내일은 얼마나 많은 한숨을 내쉬게 될까?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