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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말 Sep 21. 2018

"응응 그래 같이 이겨보자고"

강남에서 집으로 가는 길. 어디로 향하며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 가늠이 어려운 어둡고 갑갑한 지하철을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다소 비싸지만 갈아탈 필요도, 서서 갈 가능성도 현저히 낮은 빨간 버스를 탔다. 갑갑해서 지하철을 포기했으니, 평소에 앉던 맨 뒷자리를 두고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래야 내가 어딜 어떻게 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빨간 버스 앞자리는 사람들이 잘 앉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좀 더 여유 있게 앉아서 갈 수 있다.


 딱 한 정거장만 여유 있게 갈 수 있었다. 본인의 몸보다 더 두꺼운, 유행이 지난 키플링 가방을 멘 사람이 내 옆에 앉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들의 동년배들이 그러하듯 일단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거기에 걸릴만한 사람이나 기타 소지품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우악스런 회전반경 안에서 뚱뚱한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메고는 지갑을 찾았고, 작은 고깃배처럼 출렁이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힘없는 다리를 후들거리며 기사양반을 둘러싼 버스의 파란 기둥을 필사적으로 잡고는 유약한 상체를 타잔처럼 기울여. 마침내 카드를 찍었다.


나서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그녀가 추가적 신경 쓰임을 만들지 않길 바랬다. 나는 충분히 피로하고 피곤했고 저 멀리 허기짐의 그림자가 내게 드리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내는 부시럭 소리가 허쉬 초코렛 아몬드를 까는 소리라는 것도 알았다. 나는 좀 더 그녀를 찬찬히 보기로 했다. 왜 인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욕심은 전혀 없었고 그저 투영이었다.


할멈의 옷은 집에서 주워 걸칠만한 것은 아니었다. 신경을 좀 쓰셨다. 하늘하늘한 상의와 하의는 옷을 보관하면서 생기는 주름이 없었다. 그러나 머리칼은 보라색이었다. 만화영화 주인공이 아니라면 머리카락이 보라색인 이유는 바래버린 염색이 햇빛에 조금 묻어서였을 것이다. 할멈의 전화를 통해서 나는 할멈이 친구를 만나러 강남에 온 게 아니라 병원에 다녀온 것임을 알았다.


할멈은 큰 폴더폰으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본인은 이제 막 출발했고, 버스는 어디로 갈 것이며, 예상하는 도착시간과 그리고 그에 맞추어 다시 본인이 전화하겠다고 마무리하며 전활 끊었다. 버스 타고 잘 가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또 어디론가 전활 한다. 그리고. 또 어디론가 전활 걸어 "같이 이겨보자"는 말을 하면서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짓고 있었다. 그 같이 이기자는 말은 나에게 솔직하고도 잔잔한 아픔이 되었다. 나에게 보여준 가족의 유대가 얼마나 강한 힘을 지녔는지. 그러면서 얼마나 따스한지. 그리고 내가 친절한 아들이 되어주지 못했음을 확인시켜주는 말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할멈의 돋보기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굴곡져 있었다. 나는 또 생각했다. 아직 젊은 채 우리와 멀어진 당신을. 그리고 저 나이의 당신은 어떤 모습일지를. 당신도 저렇게 바랜 염색을 달고서 굴곡져 보이는 세상을 관조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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