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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말 Aug 18. 2018

이해? 그것도 어차피 니 기준

근래 들어 사람 이해에 관한 강박이 생겼다. 인간관계라는 씨실과 날실을 엮으면서 생겨나는 사건을 통하면서 말이다. 내가 과연 상대를 올바르게,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다시금 생각한다. 너무 깊은 생각이 나를 더 나답지 못하게 만들고, 또 그래서 상대에게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싶기도 하다. 그러다 세상의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몇몇의 말은 강연이라 하는 근사한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나를 숨기지 말라고, 이런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계라면 사랑하는 이들에게 쏟기도 부족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며 청중들을 설득했다.


소중한 의견이자 조언이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 반응은 충분히 엇갈릴 수 있다. '이런 나를 이해해줘'라는 말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는 말로 엇갈리지 않을까. 이 둘의 출발점과 목표점은 일치할 수 있고, 단지 표현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표현의 차이라고 넘어가기엔 지향점은 오묘하게 다르다. 둘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은 '이해'다. 내가 정의하는 인간은 사람에 이해가 더해진 존재다. 그 인간이 모여서 관계를 형성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은 인간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강요이자 폭력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이해의 기준이 상대가 아닌 내가 되는 순간. 이해는 이해가 아니라 정의 내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궁극적 이해는 상대방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이해다. 그래서 나는 자기중심적 이해를 경계한다. 생각의 주체가 곧 나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앞서 말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해라는 것은 사람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지 내가 만든 법으로 판결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활용하는 이해의 범위가 타인의 그것과 얼마나 유사성을 지니는지 비교해 봄직도 하다. 상대방을 중심으로 하는 이해는 시시때때로 변화할 것이기에, 생각의 유연성도 필수적이다. 유사성과 유연성을 기준으로 자신이 가진 이해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찌 보면 그래서 너무도 이기적인 사람들은 이해라는 것을 못하는가 이해가 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해를 너무도 잘 하는 사람은 자기중심이 너무도 흐려지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필요 역시 있다고 본다.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절대적이면서도 그 해결법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YES나 NO의 갈래에서 단정 짓기 어렵다. 그래서 이해라는 것은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전적인 기준을 세워서는 안되는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이해해줬음을 알리는 것 역시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해주었으니 너도 여기까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닌 거래다. 완전한 이해는 없다. 완전한 이해에 지친 때때로 개개인 각자가 이해라고 착각하는 폭력을 어디까지 용인해주느냐, 이 용인의 범위나 참을성이 이해는 아닌가 싶다.


이해하며 살 수는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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