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내가 보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던 그런 때가 있었다. 내 자신이 자만심으로 뭉쳐있었던 중학생 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넉넉한 벌이는 아니었던 집안 형편 때문에, 부모님이 주는 것이 세상의 전부 인 줄로 알고 있던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후 나는 성인이 되어 좀 더 다양한 세상을 접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유년이 불안하거나 부족했던 것은 아니며, 좁은 세상이 최선이었던 부모에게 원망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그때의 우리는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부족함을 느꼈던 그런 아쉽고도 처량한 감정이 문득 떠올라서 쓰는 글이다.
나는 깔끔하고 정리된 동네에서 자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선이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깨지는 유리창 소리가 들리는 남중을 다녔고, 인문계 고등학교였음에도 많은 학생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등교하는 그런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도 당연히 교회는 있었으며, 그곳에는 맘씨 좋은 교회 선생님도 있었다. 고 2~3학년을 담당했던 그분은 어느 날 우리 고등반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다고 했고, 피차간 비슷한 형편에서 오래도록 얼굴을 봐온 우리로서는 거절할 이유 없이 얻어먹을 생각에 조금은 들떠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중화요리를 먹자고 했다. 나는 중국집을 생각했다. 상가 지하에 있던 우리 동네 중국집. 먼지와 기름 공기가 얽혀 찐덕한 테이블이 3개 정도 있었고, 단골이던 나와 친구들이 그 찐덕한 테이블에 앉아 온갖 단어 앞뒤에 쌍시옷을 얹어가며 짜장면을 시켰던 그 중국집을 떠올렸다. 때에 절은 검정 오리털 패딩을 입고선 때때로 문방구 앞에 있는 오락기의 몇 배나 되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욕설을 섞어 격렬하게 격투 게임을 하던 앞니가 하나 빠진 배달형이 있던 그곳.
선생님과 나는 선생님의 차에 올라 중화요리집으로 향했고, 나머지 학생들인 형 두 명은 선생님 차의 뒷자리를 마다하고 새로 산 중고 50 씨씨 스쿠터에 올라 급류 타는 카누처럼 도로를 비볐다. 번호판이 없는 스쿠터가 그리는 한 획 한 획은 자신감이 넘쳤다.
도착한 중화요리 집. 중국에 가본 적은 없었던 나지만, 마치 중국에 온 것처럼, 그곳은 중국 땅덩이처럼 넓었고 치렁치렁한 붉은 인테리어로 장식되어 있었다. 여기서 나는 어떤 음식을 먹을지 기대됨과 동시에, 나에게 메뉴 선택권이 온다면 어떤 가격대의 것을 먹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너무 비싼 것은 선생님이 곤란할 텐데 비싼 것 밖에 없으면 어쩌나 하는 그런 우습고도 처량한 고민을 했다.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동네의 중국집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방이 있는 중국집은 처음 봤다. 드라마 황제의 딸에 나온 그런 창호지 문스러운 병풍 같은 것들로 홀마다 작은 구획이 그어졌었다. 테이블은 끈적이지 않았고, 그릇들은 그들의 소속과 전화번호가 적힌 더그럭 거리는 프라스틱이 아니었다. 한입 빨면 흐늘거리는 나무 가시들이 튀어나오는 젓가락도 아니었다. 또한 페트병에 얼린 보리차가 아니라, 도기 주전자에 담긴 따뜻한 물과 잔이 나왔다. 주인장의 말투는 화교 느낌이 났지만 고급스러웠기에 배달형이 떠올랐던 이유는 왜일까.
주인장의 추천 메뉴는 유린기, 양장피처럼 이름으로 음식을 형용하기 어려운 단어의 홍수였다. 어떤 음식이 나올지도 모르기에. 기어코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탕수육을 시켰다. 몸에 딱 붙게 수선한 교복을 입은 형은 음식을 기다리면서 코를 풀었는데, 매연 때문에 코가 까맣게 나온다면서 오토바이마저 미처 헝클어뜨리지 못한 그의 샤기컷 울프컷 친구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일리가 있겠다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짜장면이 나오자 괜히 반가웠다. 코를 풀었던 형은 드디어 아는 게 나왔다는 듯. 짜장면에 고춧가루를 뿌려 먹으면 그렇게 맛있다면서 고춧가루를 찾았다. 본인이 중국집에서 일할 때는 이렇게 꼭 먹는다면서 나에게도 권했기에 나도 그렇게 뿌려서 먹었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익숙한 메뉴로 식사를 했다. 어떤 맛인지는 시간이 오래 지났기에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런 중화요리를 꼭 그렇게 동네 스타일로 먹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음식을 어느 정도 다 먹고 나서 우리는 교회 선생님의 착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여종업원이 후식으로 또 하나를 내어왔다. 그건 한눈에 보아도 동물 뇌였다. 아 이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조금 당황했다. 왕사탕만 한 투명하고도 주름진 그것은 틀림없는 작은 동물의 뇌였다. 그것을 처음 본 우리는 서로에게 먹어보라고 권했지만 그 누구도 용기 있게 다가서지 못하고 겁먹은 채 젓가락으로 조금 찔러보기만 했다. 괜히 세게 찔렀다가 음식을 망치면 어쩔까 싶어서 요리의 품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건드린. 가난이 가르친 후험에서 나온 선험이었다.
뇌는 뇌수와 함께 그릇에 담겨져서 나왔다. 우리의 궁핍한 상식은 본인 각자가 보고 들은 온갖 망상과 어우러져 극단을 치닫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선생님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있었을 뿐. 처음 만난 괴상한 음식을 만나 당황한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물어볼 용기도 없었고, 그건 좀 쪽팔리다 생각하는 청소년들이었다. 어설픈 도시 놈들이 촌놈을 지목하며 놀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용기를 낸 누군가가 선생님께 조용히 물었으나, 선생님은 웃음 지으며 본인도 모르겠으니 한 번 주인장에게 직접 물어보자고 하셨다. 우리의 호출에 방금 전 여종업원이 왔다. 궁금증이 가득 찬 형님들은 후식의 정체에 대해서 전에 없는 쭈뼛거림으로 물음을 던졌다. 여종업원은 방긋이 웃으며 열대 과일이며 그것의 이름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우리는 고작 과일에 겁먹은 서로를 놀렸다. 그리고 경계심을 풀고 그 과일에 입을 대었으나 맛과 향은 너무도 생경했기에 그렇게 와 닿지 않아 남기고야 말았다. 큰 충격으로 갑작스레 다가온 다른 세상의 바깥 고리는 너무 강렬했던 걸까. 헌데 나는 그 이름을 다시 접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리고 통조림이 아닌 실제의 형체를 만나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며칠 전 옆지기와 함께 스키장에 다녀왔다. 나로서는 스키장이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늘 스키장에 갈 때마다 여유에서 나오는 경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스키장에 갔다. 알다시피 스키장에는 어린아이들이 많다. 아이들은 금방 자라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 아동복은 약간 더 큰 치수의 옷을 사는 것이 지극히 정상인 줄 알고 살았다. 나는 사계절을 입을 옷도 그렇게 샀는데, 아동의 한 철만 입을 특수한 옷과 장비를 재화와 시간을 들여 즐기러 온 그들이 사뭇 부러웠다. 귀여운 아동 스키복을 입고 자그마한 스키를 신은 꼬맹이가 강사의 지도를 받아 열심히 A자를 그리며 슬로프를 내려가는 모습. 내 눈에는 거대해 보였던 꼬맹이는 리프트를 타고 올라갈 때마다 찾아보지 않아도 눈에 띄었다.
애들은 금방 클텐데. 라는 말은 그들에게 전혀 와 닿지 않은 그런 말인지라 신기하기도 하고, 이제 이런 것을 즐기기에는 신체도 생각도 굳어 늙어버린 부모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의 자녀들도 떠올렸다. 내가 사는 지금이야 과도기라 늦게 접해도 괜찮을 텐데.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침없이 발전하기에 혹시나 아이들에겐 늦은 시간이랄 것도 없이 기본으로 자리 잡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말이다. 아무렇지 않게 스키를 익히던 꼬맹이를 보면서 나는.
그때의 생각과 '리치'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