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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말 Jul 25. 2016

베껴쓰기가 싫다

나이를 먹으면서 일종의 한계를 체감하는 일이 점점 싫어진다. 이제는 젊음으로 밀고 나갈 지구력도 없다. 사회가 요구하는 '나잇값'은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힘을 앗아간다. 그냥 요즘 일목요연하면서도 부실하지 않은 풍부함. 거기게 빠지지 않은 설득력으로 나를 끌어들이는 글을 보면 자꾸 힘이 빠진다. 그리고 부실하고 엉성하기만 한 내 글과 비교하게 된다.


에둘러 표현하자면 어린아이가 어른의 물건을 따라 만든 것처럼 너무나 조악하게만 느껴진다. 어린아이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찰흙으로 곱게 빚어진 차는 앞으로 달려가지 못한다. 솜씨가 좋다고 할지언정 그것은 어린아이들 사이에서지. 그 진흙 차는 보기에는 차의 형상을 띄기 때문에 차라고 불러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잘 쓰여진 글을 탐하게 된다. 베껴쓰기를 해야 하나 싶다.


그러나 특별히 나는 베껴쓰기를 하지 않는다. 베껴쓰기의 주요 이유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 더 나아가 '내 것'화 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못내 싫다. 본래 남의 것이었던 글이 내 것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나만의 독창성을 일부 양보해야만 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생각하는 베껴쓰기는 나의 제한된 역량 범위 내에서 독창을 양보해야만 한다는 것이 필요조건이다. 여기서 나는 배껴쓰기라는 훈련이 어쩌면 미래를 보지 않는 근시안적 훈련은 아닌지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배껴쓰는 것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것을 생긴 그대로 배껴그린다고 할지언정. 나는 차마 내 것이 된 그것을 모조리 남김없이 모조리 쏟아부어서 종이에 내려놓을 수가 없다.


모조리 부어버리면 다음에 내가 써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남겨놓아야 한다. '내 것'화 시킨 베껴쓰기가 끝나고 남겨진 어느 글감은 자연적으로 내 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이겨낼 수가 없다. 고로 나는 베껴쓰기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창의를 잡아먹히는, 일종의 거부반응을 감내해야만 한다. 배껴쓰기 이후의 모든 창작과정에 내가 배껴쓴 글의 색채가 조금이라도 묻은 듯한 꺼림칙함을 말하는 것이다.


베껴쓰기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썼던 문장이 혹시나 내가 어디서 인식했던 문장은 아닌가 걱정하는 일이 잦다. 나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표절을 마주치기 싫다. 머리는 자꾸만 멍청해져서 내 것인지 아닌지도 판가름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세상은 날로 발전해, 지금 어디선가에서도 새로운 문장이 나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불안하다. 그래서 난 베껴 쓰지 못한다. 모방을 통한 창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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