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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말 Feb 09. 2017

너를 그곳에 버리지 못했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싶은 순간이 온다. 이것은 남겨져야 하거나 다른 이것은 버려져야 하거나 저울질하기도 어려운 그런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마음이 좁아서 많은 것을 버리고만 싶고, 작은 것 하나 되돌아보기 싫어진다. 내가 그동안 가졌던 것이 크고 작았구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것을 버리고 버려 나 혼자만 들고 있고 싶어지는 그런 순간이 온다.


전화가 왔다. 받지 말았어야 했다. 휴대전화 화면에 뜬 너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나에게 귀 기울이고 있을 그 시간. 나는 너의 이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이름을 바라보면서 너를 들어야 하는지 듣지 말아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고민에 대해서 생각했다. 고민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생각했다. 고민은 그저 정당화의 시간을 뿐이었다.


어차피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정당화될 일련의 과정이 혹여 쉬워 보이지는 않는 것인지, 경솔한 것은 아닌지. 그렇게 판단을 보류하는 순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너를 듣지 않으려 고민하는 나는 무엇인가 생각했다. 많은 생각이 겹치고 겹쳤다. 그리고 나는 많은 것을 버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버리기 위해 전화를 받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니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겉돌았을 뿐, 알맹이는 없었음에도 그 겉도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알맹이에 다가서지 못한 채, 다른 알맹이를 찾을까 기울였던 여타의 노력은 예전처럼 늘 그렇듯 소득이 없었다. 소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득을 찾았다. 소득을 찾으려 한다는 제스처만 보였을 뿐. 새삼스러운 다른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잠든 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휴대전화에 뜬 너의 이름을 바라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불현듯 입냄새가 날까 코로 숨을 쉬었다. 코에서 나오는 숨이 널 간질이지 않았으면 싶었다. 가글을 하고 싶었다. 뒤척이면 잠에서 깰까 생각했다.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그 자리 그대로 있는 리스테린을 집었다. 따가운 혓바닥과 잇몸이 느껴졌지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따가움을 느낀 후에서야 나는 잠들 수 있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 모든 것들이 드디어 잠들기 시작하는 그런 진한 저녁과 새벽 사이에 눈이 뜨였다. 베개에 파묻힌 왼쪽이 아닌, 아무것도 덮이지 않은 오른 눈으로 뜬 눈에는 네가 있었다. 너는 조용히 자근자근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드비쉬의 달빛을 들으며 나는 조용히 오른 눈을 깜빡였다. 닫히고 열리는 눈꺼풀을 따라서, 어둠과 네가 교차했다.


어느 날인가 문득 네 눈에 내가 담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멀어질 수 있었다. 내가 담겼던 그 눈에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이 비춰지는 것을 알았을 땐 너무도 늦어버렸다. 다른 것들이 비춰지는 그 시간부터 지금까지 너는 노력하고 노력한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 노력이 비록 아무런 알맹이가 없을지라도 너와 나의 행동은 거짓말처럼 변함이 없었다.


평소 같더라면 양 손목을 감싸 쥐었겠지만. 나는 말리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도시의 야경이 아니라 달빛이 너와 피아노의 솔직한 실루엣을 보여주었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네가 떠난 너의 자리엔 눈물이 있을 줄 알았는데, 너의 베개엔 아무것도 없었다.


곡이 끝나기 전에 나는 서둘러 자는 척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느새 식은 몸이 다가왔다. 감싸주고 싶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뒷편으로 넘겨주고 싶었다. 가만히 그렇게 뒷편으로 머리카락을 보내다 연골이 연약한 귀을 만져주고 싶었다. 눈썹이 그려진 길을 따라서 손가락을 대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콧날을 따라서 내려오다 너의 숨을 쓰다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네가 눈을 떠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봐서 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저 내 숨이 너에게 닿기만을 바라며 눈을 감고서, 어차피 지나버릴 이 순간이 조금은 천천히 지나가 주기를 소망했다. 이 순간이 지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날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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