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즈는 때려 밟아야 120이고, 닭은 날갯짓해봐야 닭털만 빠진다.
어설픈 재능은 선남선녀 연예인을 억울하게 닮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생기질 못해서 연예인은 하지 못하고 일반인으로 살아가는 그것이랄까. 인정이라는 게 사실 어느 사회적 기준선을 넘어야 생겨나는 것인데, 사회적 기준선이라는 것이 또 우스운 거다. 뭣도 없던 옛날이나 기준선이 기준선 나름이었지, 요즘처럼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많은 요즘의 기준선이라면 높기도 너무 높다. 더군다나 요즘은 선남선녀가 참 많기도 많다.
물려받은 재능으로 기준선을 이미 넘겨버린 자마저 노력하는데, 어설픈 재능러들은 선을 넘으려는데만 너무도 많은 힘이 드는 것이다. 특히 완벽에 가까워져 보이는 진짜 재능러들을 보면서, 화수분 같은 결핍에 사로잡혀가는 어설픈 재능러들은 오늘도 완벽이란 이상향에 발목 잡혀. 채 한걸음도 디디질 못하고 절뚝거린다.
차라리. 정녕. 있어 보이는, 시덥지 않은, 그럭저럭의 재능을 썩히며 주변인들이 아까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보람차고 희열감을 선사한다. 그 짜릿한 희열이 건네는 합리화의 오르가즘은 내추럴 본 재능러를 질투하는 본인의 다른 모습이자 본인이 열망하는 자화상에 가깝다. 그러나 이것은 본인의 재능이 재롱으로 타인의 유희가 되는 것은 보기 싫은 마지막 자존심, 나라도 인정해 주어야 하는 내 재능의 마지막 희열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는 하지만 다들 종국에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무리 남보다 잘하는 거라고는 하지만 선택되지 않은 노력자들의 최선은 저기 엑스트라들 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조차도 엑스트라가 시야에 들어오질 않는다. 이래 봬도 저 사람들 나름대로 주변에서 나름 춤 깨나 춘다고 지겹도록 칭찬 들어본 사람들이지 않을까.
춤을 잘 추느냐 못 추느냐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체능이라는 녀석이 그러하다. 문제를 푸느냐 못 푸느냐처럼 산술적으로 결과값을 내놓기 어려운 분야다. 그러나 우리는 그 차이를 알고 있으며 구분해 낼 수 있다.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없애도 충분히 구별해낼 수 있는 것. 바로 이 점이 무서운 것이다.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거의 본능이라는 수단 말고는 평가 내리기 어렵다.
본능이 알게 되는 영역에서, 과연 노력은 소용이 있나 싶다. 대부분 저런 친구들은 재능도 있는 데다가 노력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이젠 따라잡고자 하는 의지가 자포자기의 단계로 진입한다. 이 단계는 산술적 수치로 구분해 낼 수 없는 것이야말로 현격한 차이로만 구분됨을 배우는 순간이다. 본능이 깨우쳐주는 한 끗이 그렇고 아니고의 잔인한 이분법을 도출해내는 것.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냉혹한 것이며, 재능이 없는 자들에겐 한없이 배고프고 야멸찬 것임을 자평한다.
내가 잘하는 것을 살리지 못하는 것은 슬프다. 먹고사니즘의 거대한 파도를 헤쳐나갈 배라고 생각했으나 거대한 파도 앞에서야 비로소 내 작은 배를 깨닫게 되고, 이제는 그 파도를 고스란히 맞아야 할 차례임을 깨닫는 그런 순간이 슬프다. 그 파도를 뚫는 거대한 배를 목격할 때의 패배감은 또 어떤가. 나름 먼 바다로 나왔건만 다시 육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 고민할 때, 힘들게 만든 작은 배가 미워지기 시작하는 그 때의 잡념은 얼마나 잔인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