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을 위해 세상에 왔다면, 체험 밖으로 나와 현실이 무엇인지 초월하여 깨닫는 자들은 어떤 존재일까? 현실에 몰입되는 체험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걸까? 아마도 세상에 온 초기에는 오감으로 경험하기 위해 체험에 몰입되었겠지만, 충분히 경험하고 나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알아채감과 동시에 본래의 근원 상태를 느끼려는 열망에 빠져드는 듯하다.
무의식의 감정들을 허용하고, 의식이 맑아진 후에는 원할 때 주시자 시점으로 전환할 수 있다. '36세의 4D 영상을 시청하는 나'를 느끼며, 근원의 입장에 서서 현실에서 한발 물러선다. 그리고 이 4D 영상은 나의 무의식으로부터 나왔음을 안다. 그리고 이 앎이 의식의 바탕에 깔려있다.
근원의 관점에서 현실을 내려다보면 현실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이 느껴지면서 무한한 편안함이 밀려온다. 이전에는 사후에는 에고가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는데, 지금은 생과사는 변환의 창구이고 게임하던 세계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생각만이 든다. 오히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안도감을 준다. 안도감의 원천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신의 상태로의 회귀, 무한한 편안함인 근원에 합일되는 느낌을 느끼기 때문이다.
요즘 글을 드물게 쓴 이유는 감정과 관념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져서 한 가지 감정이나 생각에 오래 머물지 않아서이다. 무의식 속 감정과 관념을 허용하면, 순간이 순수하게 느껴지며 찰나 생 찰라멸의 흐름을 따르게 되어, 생각과 감정의 존재의 잔상은 짧아진다. 이전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고, 표현하고 싶은 느낌과 감정이 많아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하면, 지금은 근원과 연결된 느낌, 초월감을 느끼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싶어졌다. 그동안 경험한 내용을 풀고자 하였으나, 느낌을 느끼느라(수행의 일환) 글을 쓸 시간을 놓쳤다.
현실이 초월되는 느낌은 '죽음 명상' 후에 더욱 뚜렷해졌다. ('죽음 명상' 글 참고 부탁드립니다.)
현실이 초월된 느낌은 사실 근원과의 연계점을 깨닫고, 그것을 아는 바탕 의식의 앎이 있으며, 그 감각을 자각하여 떠올릴 수 있을 때 느껴진다. 쉽게 말하자면 무의식의 가장 아랫부분이 근원이며 현실은 표피에 가깝다. 또한 현실은 마음이 만들어 낸 꿈인데, 이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되면 몸과의 동일시가 옅어지면서 자신의 몸이 하나의 캐릭터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때에는 나를 나라고 하지 않고 "얘"라고 부르기도 한다.
핵심은 근원과의 연결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주시자 시점이 회복된다. 모든 시크릿이나 심상화는 이 주시자 위치에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규정하는 자'가 있고 '규정된 자'가 있다면, 근원의 관점에서 몸을 내려다보는 관점이 '규정하는 자'의 관점이고, 몸과 동일 시 되어 현실을 체험하면서 희로애락을 느끼는 상태가 '규정된 자'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글로 잘 풀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삶은 무의식의 표현'이라는 것을 글로 풀어보려는 시도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내게 새로운 미션이 왔음을 느낀다. 에너지를 활용하는 법과 에너지를 치유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은 휴일 기간에 차차 계획을 세워보려 한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데 그것을 어떻게 해?라고 생각하지만 하게 되면 어느 순간 한 순간에 진행되어 있어 놀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