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하철 안에서 벌어지는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권리가 충돌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지금의 혼란은 권리와 권리의 싸움이 아니다.
국가가 책임을 방기한 결과를 시민들이 떠안고 있는 장면에 가깝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겠다는 정책은 반복돼 왔다.
그러나 그 약속은 늘 반쪽에 머물렀다.
엘리베이터 설치는 더뎠고,
버스 운행과 환승 체계에 대해서도
지역사회는 끝내 준비되지 않았다.
정책은 거창했지만 예산은 늘 부족했고,
제도는 현장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 공백 속에서
장애인은 자신의 권리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장소,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시간인
출근 시간대 지하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비장애 시민은 하루 중 가장 팍팍한 출근길에서
분노와 불편을 함께 떠안게 됐다.
회사에 가는 일만으로도 버거운 하루에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더해졌다는 호소는 끊이지 않는다.
"적당히들 하셔야지"
“장애인이 뭐 벼슬이야?”
“시위 때문에 지각했다. 출퇴근이 너무 불편하다.”
이 말들은 날카롭다.
그러나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누군가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방식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일상과 권리가 흔들릴 때,
분노는 가장 가까운 약자를 향해 튀어나오기 쉽다.
이 분노가 정말 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장애인의 이동권은 특혜가 아니다.
비장애인이 당연하게 누려온 일상을
장애인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사회적 조건이다.
동시에 출퇴근의 불편 역시
개인이 감내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시민들 간의 권리 갈등은
지하철 선로 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지하철 계단에 설치된 이동식 리프트는
오랫동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방치돼 온 임시방편의 상징이다.
휠체어를 철제 받침대에 고정한 채
길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는 구조는
특히 중증장애인에게 지나치게 위험하다.
출퇴근 시간처럼 사람들이 밀집한 계단에서
이 리프트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인 선택인지 되묻게 된다.
리프트는 이동을 돕는 장치라기보다
장애인의 이동 시간을 특정 시간대로 제한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불편과 갈등을 만들어 왔다.
엘리베이터를 둘러싼 상황도 다르지 않다.
휠체어를 탄 시민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 했지만,
보행이 가능한 중,노년층 시민들이 먼저 탑승하면서
정작 휠체어 이용자는 타지 못했다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 장면을 개인의 배려 부족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엘리베이터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누가 우선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과 안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이유로 이동이 어려운 시민들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갈등을 만든 것은
그 자리에 있던 개인들이 아니라,
문제를 임시방편으로 덮어온 구조 그 자체다.
이 두 권리는 본래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같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시민임에도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게 만들고,
시민의 권리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누어
서로 충돌하게 만든 주체는
제도를 설계하고 집행해야 할 정부다.
국가는 언제까지
시민과 시민이 서로를 원망하며 충돌하는 장면을
구경하듯 방치할 것인가.
언제까지 책임을 아래로만 떠넘기며
이 갈등이 자연발생한 것처럼 말할 것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누가 더 불편한가”를 겨루는 경쟁이 아니라,
왜 이 불편이 반복되는지에 대한 국가의 응답이다.
권리 충돌이 불가피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유독 무례하거나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다.
비교할 수 있는 사례는 이미 존재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휠체어 이용자가 트램과 열차, 버스를 타고 내리는 과정이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단차를 최소화한 플랫폼, 저상 차량, 명확한 안내와 설계 덕분에
이동은 기다림이나 양보의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전제된 권리로 작동한다.
미국 LA나 뉴욕 같은 대도시 역시 마찬가지다.
교통 체증이 심한 도로 위에서도
버스에 설치된 리프트로 장애인이 승하차하는 시간은
누군가의 불만을 자극하지 않는다.
그 시간은 지연이 아니라
당연히 포함된 이동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이 차이는 시민의 인격이나 도덕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권리를 전제로 설계된 시스템과
그 권리를 지지해 온 국가의 책임에서 비롯된 차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빨리빨리’, ‘급하다 급해’의 문화 역시
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의 산물이다.
권리를 기다릴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서
불만과 충돌이 쌓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런 상태에서 장기적인 시위가 이어질수록
시민 간의 감정적 골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의 일상을 방해하는 존재처럼 인식되는 순간,
권리는 더 쉽게 적대의 언어로 변한다.
그래서 이 문제의 책임은
결코 장애를 가진 시민에게도, 비장애 시민에게도 있지 않다.
누군가의 권리를
다른 누군가의 인내에 의존하게 만든 구조,
그 구조를 방치해 온 정부에 있다.
권리는 싸우지 않는다.
싸우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책임지지 않는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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