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노출 시대, 창작자의 딜레마와 고갈되는 영혼의 샘물
자판 위에서 멈춘 글쓰기의 본질
글을 쓰는 것인지, 글을 쫓는 것인지. 오늘도 나는 노트북 자판을 기계적으로 두드립니다. 탁탁, 거친 자판 소리는 글을 찍어냅니다. 영혼의 무게를 담아 '쓰는 행위'가 아닌, 정해진 규격과 정량을 맞춰 '채우는 행위'가 되는 순간입니다. 여기저기 얼굴 없는 콘텐츠를 쏟아내기 위해, 하루의 몫을 채우는 일은 이제 일상의 의무가 되었습니다.
글쓰기의 고통이 정화가 아닌 노동이 될 때, 창작자는 고독합니다. 우리는 사막 같은 감정의 그릇을 박박 긁어내고, 때로는 그 그릇마저 갈아 넣습니다. 독자들이 모르는 이면에는, 고갈되어 가는 영혼의 샘물이 있습니다. 그 샘물 없이는 글이 마를 것을 알기에, 우리는 기계적인 손놀림 속에 감정을 쥐어짜는 모순을 반복합니다.
콘텐츠라는 이름의 독려와 배신
어느 순간부터 글쓰기는 돈이 되고,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나를 독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독려는 달콤하지만 위험합니다. 글의 가치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닌, '전환율'과 '노출 지수'라는 외적 결과에 의해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누가 깊이 읽어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로지 상위 노출이라는 냉정한 목표만을 꿈꿉니다. 상위 노출은 독자에게 닿기 위한 정글의 법칙이며, 글쓰기를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품으로 규정짓는 현실적인 명제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발을 담그고 있는 구조적 현실이며, 그 속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창작자들의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일지 모릅니다.
돈을 찍어내듯이, 나를 만들어내듯이
이제 글을 쓰지 않습니다. 글을 만들어냅니다. 마치 돈을 찍어내듯이.
이 고백은 타인을 향한 비난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한 가장 처절한 자성입니다. 나는 지금 콘텐츠의 파도 속에서 '나라는 정체성'마저도 시장에 맞춰 재가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이 원하는 형식에 맞춰 나의 깊은 생각들을 분절하고 포장하며, 나의 진실성을 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두드리는 자판의 소리는, 어쩌면 순수한 글쓰기에서 멀어지는 나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음인지 모릅니다.
다시, 나의 음률을 찾아서
글쓰기와 물질이 분리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계적인 생산의 사이클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물어야 합니다.
내가 정말로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단 하나의 진실은 무엇인가?
많은 창작자들이 상위 노출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쫓아갈 때, 저는 이 공간에서만큼은 그 딜레마를 회피하고자 합니다. 물질의 흐름을 거스르는 나만의 진실한 음표를 심어 넣고자 합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상위 노출'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 기계적인 생산의 사이클 속에서도 놓지 않은 단 한 줄의 진실일 것입니다. 글을 쫓는 자가 아닌, 다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오늘, 당신의 글쓰기 속 '그 한 줄의 진실'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