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자리에 박힌 바람개비였다
전철역사를 나오자마자 회색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든다.
살갗을 거칠게 휘감으며 파고드는 이 바람은 단순히 춥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안개처럼 뿌연 고단함이 온몸을 엄습하는 기분이다.
건조하게 조여진 심장의 박동이 유독 버겁게 들린다.
삶이 척박해서일까. 그 척박함에서 어떻게든 헤어 나오려 몸부림치던 하루의 흔적들이 너무 처절해서, 가슴 밑바닥이 다 아릿하다.
사람들 틈에서 애써 빗장 걸어 잠갔던 감정들이 차가운 바람에 속절없이 날린다.
단단히 버티고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바람 한 줄기에 절제해 온 마음들이 낙엽처럼 흩어진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한 곳에 단단히 박힌 채 돌아가는 바람개비였다는 것을.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세상이 몰아치면 몰아치는 대로 나는 참 열심히도 돌았다.
팽팽하게 돌아가는 날개 소리가 내 삶의 치열한 전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나는 여전히 삶의 무게라는 단단한 못에 박혀, 여전히 제자리에서 돌고 있지 않는가?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뜨겁게 돌고 돌았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여전히 이 차가운 보도블록 위,
회색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어제의 나 그대로다. 허탈함일까, 아니면 이마저도 삶이라는 체념일까.
그렇게 돌고 돌았건만, 결국 나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돌고 있다.
내일도 바람이 불면 나는 또 거칠게 돌아가겠지만, 오늘 밤만큼은 이 멈출 수 없는 회전이 참으로 애잔하다.
[에필로그]
"그렇게 돌고 돌았건만......"
입가에 맴도는 이 속삭임은 허무가 아니라,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 오늘 하루도 온 힘을 다해 돌아낸 나 자신에게 건네는 서글픈 위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