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을 읽다가, 작중에 쓰인 구절 하나가 인상에 남았다. 어쩌면 늙는다는 것은, 형체를 잃고 점점 액체화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정확한 워딩은 지금 직접 책을 다시 열어서 찾아봐야겠지만 대강 이런 맥락이었다.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보시는 것도 추천드린다. 담담하게 일상 속 상실의 상흔을 써 내려간 고운 책이었다.
여하튼 그 구절은 며칠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돌면서, 결국 인간은 물에서 시작해 물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확장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얼린 물을 컵에 담고 그 위로 커피를 우려낸 뜨거운 물을 붓는다. 고양이와 놀아주며 난 그것을 홀짝홀짝 들이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물과 기타 등등으로 나뉘어 소수는 내 몸이 되고 다수는 내 체액이 되어 혈관 속을 돌다가 소변이 되어 배출될 것이다. 아메리카노를 마신 나는 일어나서 거울을 한번 들여다본다. 어제 늦게 먹은 군것질거리들이 복부로 가서 불룩해졌다. 하루하루 몸은 성실하게 조금씩 탄력을 잃어간다. 난 사이클에 올라 조금이나마 불은 몸을 정리하고 활력을 더해보려 한다.
결국 삶이란. 젊음이란. 액체에서 자기 모습을 유지해 내려는 생명력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장엄한 질서에 거스르는 반항적인 힘이고 세상을 바꿀 잠재력을 지닌 힘이다. 매일 해가 뜨면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은 저마다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공기 중에 비말을 뿜는다. 개중엔 자기가 무엇을 위해 세상에 액체를 쏟아내며 열정을 다하는지 모르는 이도 있고, 누군가는 생의 마지막을 직감하고 삶의 끝자락에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세상의 관성을 거슬러보고자 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지구를 떠난 자의 그런 족적을 기리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애도한다.
한 때는 사랑하다 이별한 이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무기력에 빠져 온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웠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그립고 미련이 남아서라기보다, 살면서 가장 소중했었던 기억들이, 추억들이,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마치 거짓말 같았다. 사람이 죽었으면 모두 한데 모아 애도하고 추억이라도 할 텐데, 서로 가벼운 안부도 연락도 껄끄럽다 못해 떠오르는 순간마다 길을 걷다 예상 못한 모서리에 종아리 뼈가 부딪친 듯 당혹스럽고 아팠다. 어떤 영화에선 기억에서 전 연인의 기억을 지우고 내 인생에 처음부터 없던 사람인 척 치던데, 영화 속 장치가 그럴 뿐이지 우리 모두 살다가 누군가를 애초에 없던 사람인 척 치는 경우가 왕왕 있지 않은가. 나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그럴 테고, 그럴 때면 이 세상이라는 파도 속에서 아무런 편린조차 남지 않을 것만 같아 고독하고 외로워졌다.
그런 울적한 맘이 들 때면 홀로 훌쩍 여행을 떠나 백사장에 앉아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마치 에어컨을 세게 튼 채로 이불 속에 들어가면 더 아늑하듯이, 겨울 바다에 앉아 마시는 따뜻한 커피는 부쩍 더 포근하다. 양 겨드랑이에 두 손을 낀 채로 몸을 웅크린 채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파도는 내가 멈출 수도, 더 빠르게 치게 할 수도 없다.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자연의 묵묵한 의지다. 그 속에는 먼저 물로 돌아간 선조들과 그보다 더 오래된 생명들이, 모두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나 이전에도.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 이전에도. 그리고도 앞으로도 계속될 번민과 고민들이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그럴 때면 뜨거운 것을 마셨을 때처럼 뜨끈한 느낌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듯한 뭉클함도 느껴진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에 묻은 모래들을 툭툭 털어내고 맑고 청명한 겨울 하늘을 본다.
나도 언젠가 액체가 되고, 육신은 가루가 되면 다시 지구를 떠돌며 물이 되고 얼음이 되고 구름이 되겠지. 그럼 내가 가보지 못했던 곳, 닿지 않았던 생각들을 보며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놓을 수 없었던 것들도 놓게 되겠지. 나는 바다가 될 거야. 바다가 되면 자연스레 헤어진 이들도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때는 왜 그렇게 심각했고 어렸을까. 결국 모두 다 물이 되어 이렇게 흐를 것을. 함께 픽 하고 웃고 말겠지. 그렇게 다시 만날 때까지. 난 내 안의 작은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조용히 돌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