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 문예출판사
2020년이 되었다.
올해의 시작은 이전의 새해와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나의 첫 30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20대의 시작은 무조건적인 설렘으로 가득했다면, 30대는 약간의 망설임과 정체 모를 책임감으로 다가왔다.
"나의 서른 살은 어떤 모습일까?"
작년 초부터 나의 서른을 떠올리며 던져 온 질문이다.
멀고도 가까운 나이, 서른.
물론 30대가 되어서도 나의 삶은 이전처럼 지속될 것이고, 20대에서 30대로 변하는 나이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만큼은 20대보다 더 나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싶었다.
그런 내 안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서른 살에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가볼까? 뭔가 새로운 취미를 가져볼까? 아니면 새로운 것을 배워볼까? 이런저런 즐거운 상상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런 상상이 근본적으로 내 안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상상은 '10대의 나'도, '20대의 나'도 꾸준히 해 온 '기존의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부족한 영역,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있어 변화가 필요했다.
나에게는 '사랑'이 그러했다.
사랑도 배워야 하나요?
10대, 20대의 나에게 사랑은 좁게는 이성과의 연애, 조금 넓게는 가족과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 그 정도였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사랑은 어찌보면 내가 힘들게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기 보다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일 때가 많았다. 감사하게도 나의 주변사람들로부터 풍족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불행히도 나는 사랑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대 후반이 되어갈수록 내 사랑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 내가 사는 세상, 나아가 신에 대한 나의 사랑이 부족하고, 그 점이 때때로 삶의 공허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공허함이 노력없이는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나서야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가운데 수고와 노력없이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없었다. 특히 그것이 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말이다.
그런데 왜 사랑은 그저 노력없이 얻기를 바랬을까?
조금은 늦었지만, 30대의 나는 '사랑'을 배워보려고 한다.
사랑도 '능력'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단지, 사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얼만큼 알고 발휘하는가에 따라 얻게 되는 결과가 달라질 뿐. 이런 생각과 함께 한 권의 책이 생각났다. 작년 10월 즈음에 읽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
이 책은 현대인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꼬집고, 사랑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상실된 사랑을 회복하고자 한다. 제목은 '사랑의 기술'이지만 실용서라기 보다는 사랑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담긴 책이다. 책의 내용은 크게 '사랑에 대한 현대인의 오해', '사랑의 이론적 정의', '사랑의 실천' 등으로 나눠진다. 이 글에서도 세 방향으로 책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 책은 현대인이 인식하는 '사랑'에 대한 철학적 고찰로 시작된다. 사랑은 행운인가? 사랑은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사랑은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가? 등 우리가 사랑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관념들에 대해 저자는 질문한다.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혹은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물론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이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갈망하고, 행복한 사랑의 이야기,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무수한 영화를 보며, 사랑을 노래한 시시한 수백 가지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3)
저자는 현대인들의 오해, 즉 '사랑은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세 가지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13-18)
첫째, 사랑의 문제는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하는 것.
둘째,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생각이다. 그들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혹은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울 뿐인 것이다.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 (좀 더 분명하게는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고 일체라고 느끼는 기적적인 합일의 순간을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시간이 흘러 점점 줄어드는 기적적인 면으로 인해 적대감, 실망감, 권태를 느낀다.
위의 생각들은 우리의 사랑이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게 되어버리는 결정적 원인이다. 저자는 우리가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기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숨을 쉴 수 없고, 돈이 없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은 없어도 내 육체를 보존함에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 없이 인생을 제대로 살기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는 인간이 태생적으로부터 경험하는 분리 불안을 이유로 든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동포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미래 가능성을 알고 있다.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인간의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24)
따라서 인간의 사랑에 대한 갈망은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하고 고독이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서는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가', '어떻게 외부와 결합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해 왔다. 이 문제는 동일한 근원, 곧 인간의 실존 조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종교와 철학의 역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의 역사였다(26).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을 수 있다. 동물 숭배, 인간의 희생 또는 군사적 정복, 사치에 탐닉, 성적 도취, 금욕, 노동, 오락, 예술적 창조, 인간의 사랑 등 자신이 속한 문화권과 개인이 도달한 개성화 정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저자는 '성숙한 사랑'만이 인간의 분리 상태를 근본적이고 지속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이라고 보았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40)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성숙한 사랑'의 특징 중 하나는 '능동성'이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 활동으로, 본래 '주는 것'이다.
저자는 '주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할 것을 요청한다. (42-43)
첫째는 비생산적인 성격으로서의 '주는 것'이다. 이때의 의미는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 된다. 성격상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혹은 저장하는 것을 지향하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준다'는 행위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둘째는 생산적인 성격으로서의 '주는 것'이다. 이때의 주는 행위는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주는 행위 자체에서 개인은 자신의 힘과 부와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큰 환희를 느낀다.
생산적인 성격으로서의 '주는 것'은 본질적으로 물질적 영역보다 인간적 영역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부자라고 해서 많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가난하다해서 많이 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곧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顯示)를 주는 것이다(45)."
그러므로 사랑을 '주는 것'은 대상에 대한 많은 관심과 지식과 노력을 요구한다. 자식을 사랑한다 말하는 부모가 자식을 충분히 보호하지 않는다면, 꽃을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이 꽃에 물 주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그들의 사랑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47)."
모든 기술이 그러하듯이, 사랑의 기술은 지속적인 시도와 실천을 통해 숙련되는 것이다. 이때의 실천은 지난하고 고독한 것으로서, 이를 두고 저자는 사랑의 실천은 '자기 훈련'과 같다고 말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하는 개인의 경험(155)"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의 완성이라는 목표는 금방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기간의 숙련이 필요하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이가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계속 시도하며고 조금씩 고쳐나가면서 결국 어느 날엔가 홀연히 쓰러지지 않고 걷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의 기술을 숙달하기 위해서는 전 생애에 걸친 지속적인 실천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저자의 말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이 아니라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87)인 것이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나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분명 쉽지 않은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에게 사랑을 향한 노력이 희망적인 이유는 사랑을 통해서 내 안에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격의 성장과 더 나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대감으로, 나의 서른은 '사랑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실천하는 한 해'가 되기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