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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달타령

by 포공영



텅 빈 채 질퍽한 밭의 한 귀퉁이에서 달랑 몇 포기만 남은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코스모스 전용이었던 그 밭은 해마다 여름 중반부터 흰색, 분홍색, 보라색, 자주색의 꽃을 피웠다. 마을회관 앞에는 꽃밭을 배경으로 한 사각형의 커다란 프레임과 의자를 놓은 포토존이 있었다. 큰 길가에 있어, 지나는 이들이 차를 세워두고 꽃구경하기에도 사진을 찍기에도 알맞았다. 코스모스밭 뒤로는 마을 장독대가 있는데, 공동 판매를 위해 마을 사람이 다 같이 만든 된장이 담겨있었다. 온몸을 흔들며 환영하는 코스모스에 홀리듯 마을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꽃구경에 이어 자연스레 주변을 둘러보다 장독대까지 보게 된다. 그중 일부가 시골 된장의 고객이 되었다.


2년 전에 찍은 코스모스밭의 모습, 뒤로 프레임과 장독대도 보인다


마늘 심기가 끝나갈 무렵, 바람이 선선하고 코스모스가 한창일 그때, 고향 마을에서는 장기자랑 대회를 열었다. 마을 곳곳에 현수막도 걸고 상품도 가득 쌓아놓고 말이다. 작년 대회가 열리던 날, 나와 동생은 산기슭 아래 밭에서 마늘을 심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일손을 도우러 간 참이었다. 세 판 남은 마늘 밭을 우리에게 맡기고 엄마는 대회에 나갔다.


마을 잔치이지만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초청 인사와 이웃 마을 손님도 와있었다. 코스모스밭과 마을회관 사이 공터에 세워진 무대에서 시끌시끌한 말소리와 함께 옛 노래의 반주가 울려 퍼졌다. 마을회관이 가깝기도 했지만, 귀가 먹먹할 정도로 소리 자체도 컸다. 사회자와 참가자의 대화, 참가자의 노래, 사회자의 우스갯소리 등등이 마늘 밭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뒷산 자모산의 고라니, 멧돼지, 다람쥐 같은 산짐승과 나무들 그리고 동네를 날아다니는 새들도 무슨 일인가 할 만큼 마을 전체가 들썩였다.


나는 손으로는 마늘을 심고 있었지만, 귀는 장기자랑에 가 있었다. 좁은 고랑에 내내 쪼그려 앉아서 하는 일이라 보통은 지루하고 힘든데, 그날은 지루할 틈은 없었다. 누구 엄마, 아버지로만 알고 있던 분들의 이름이 차례대로 불렸다. 노래 좀 한다는 분들이 참가한 모양이었다. 자신감이 듬뿍 담긴 듯이 우렁찼다.


“엄마다!” 내가 말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나와 동생은 동시에 손을 멈추고 가만히 엄마의 노래를 감상했다. ‘역시나 목청 좋아, 울 엄마.’ 나는 이유 없이 피식 웃음이 났다. 생각해 보니 엄마가 찬송가 이외의 노래를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코로나 이전까지 20여 년간을 교회 성가대로 활동해 온 엄마의 달타령은 구수하면서도 멋스러웠다. 박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도 같았다. 관객의 등 뒤에서 둘러 서 있던 코스모스도 달타령에 맞춰 흔들렸겠지.


엄마의 순번이 거의 끝이었는지, 엄마 뒤로 한 명이 더 노래한 뒤 바로 심사했다. 3등부터 호명했다. 엄마 이름이 아니었다. 2등도 엄마 이름이 아니었다. 설마? 하는데, 엄마의 이름이 불렸다. “오오오! 울 엄마 1등 했네!” 동생이 탄성을 질렀다. 내 입에서도 “우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장기자랑이 끝나자, 행운권 추첨이 이어졌다. 가능하면 모든 사람을 줄 생각이었는지 한참이나 뽑고 또 뽑았다. 오전 10시쯤 시작한 행사는 점심을 같이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며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마쳐졌다.


마을은 오디오의 정지 버튼을 누른 듯이 고요했다. 달달거리며 오는 일륜차(외발 손수레, 짐을 실어 나르는 바퀴가 하나 달린 수레) 바퀴 소리가 들릴 정도로. 엄마가 주황색 바퀴에 초록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사다리꼴 몸체를 가진 일륜차를 끌고 집으로 오고 있었다. 기존의 회색 함석 일륜차와 달라 눈에 확 띄었는데, 그 안에는 노래 1등 상의 상품이 실려있었다. 힘차게 일륜차를 미는 엄마의 모습에서 당당함이 느껴졌다.


무거워도 육개장이나 삼계탕 끓이기에 좋은 3중 냄비


알고 보니 초록색 일륜차는 행운권 추첨으로 당첨된 상품이었고, 큼직한 상자에 담긴 것은 10인분의 국 정도는 거뜬히 끓일 수 있는 스테인리스 냄비였다. 냄비 밑이 3중이두툼해서 그냥 들기만 해도 무거웠다. 엄마는 왼쪽 어깨 인대가 끊어져 무거운 물건을 들기가 힘들었다. 해서 그 냄비는 내가 가져와 쓰고 있다. 사실 엄마가 원했던 것은 냄비가 아니라 어깨에 메고 다니며 농약을 살포하는 분무기였다.


올해는 긴 가을장마로 마늘 심기가 미뤄졌다. 9월에 심을 작정으로 8월 말부터 마늘을 쪼개놓았는데, 벌써 10월 중순이다. 마을 잔치는 안 하기로 했단다. 여름에 내린 폭우로 산자락에서부터 흙이 쓸려내려 가 코스모스밭을 뒤덮어버렸다. 우리 마늘 밭의 흙도 그때 쓸려내려 가서 자갈이 훤히 드러나서 서너 트럭의 흙을 새로 사다가 쏟아부어야 했다. 때문에 부모님 집에 갈 때마다 반기듯이 살랑이던 코스모스가 있던 자리도, 지금쯤은 초록색 손가락 같은 싹을 보였을 마늘 밭도 비어 있다. 비어 있는 밭처럼 마음도 뭔가 헛헛하다.


올해도 마을 잔치가 열렸다면 엄마는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

2025년도 꿋꿋이 살아왔으니 <굳세었다, 금순아>* 어떨까?





*엄마의 이름은 O금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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