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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Dec 05. 2022

금이빨 빼고 모조리 씹어 먹어 줄게

본즈 앤 올


*스포일러 주의! 영화 관람 후에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영화관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혹스러운 것 같기도, 얼얼한 것 같기도 한 침묵이었다. 어쩌면 괴작인지 명작인지 점쳐 보고 있던 걸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누구도 쉬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본즈 앤 올>의 이야기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무서운 게 딱! 싫어!


    개봉하기 한참 전부터 이 영화를 주목하고 있었다. 호러는 절대 발을 들이지 않는 영역이지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놀라운 마법을 보여준 루카 구아다니노티모시 샬라메가 다시 한번 뭉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도저히 관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서움을 이겨내기 위해 친구들을 꼬셔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래서 어땠냐고? 카니발리즘을 소재로 한 영화고, 고어에 가까운 묘사가 등장한다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충격적이었다. 너무 잔인해서? 아니,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출처 : Geektyrant)

    주인공인 '매런(by 타일러 러셀)'이 동급생의 손가락을 생으로 뜯어먹는 첫 식인 장면을 제외하면,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잔인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충격을 받는 지점은, 살이 뜯기고 피가 흐르는 선정적인 비주얼보다는 되려 감독이 식인이라는 행위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인간을 먹어야 사는 본능을 갖고 태어난 '이터(eater)'들의 식사 장면은 그간 영화 속에서 보인 카니발(식인하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한니발 렉터처럼 우아하게 요리된 인육을 먹지 않는다. 피가 튀지 않도록 대부분의 옷을 벗고, 사체 주위에 모여든 하이에나들처럼 엎드려 이빨로 생살을 짓이긴다. 그 짐승 같은 행위를 통해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건, 이터들의 식인은 후천적 선택이 아닌 타고난 본성, 즉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자고 싸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는 생리적 욕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 명제에서 <본즈 앤 올>이라는 영화는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죄와 벌


    인류는 본능과 죄 사이에서 이미 여러 번 비슷한 논쟁을 거쳐 왔다. 대표적인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번식의 가능성이 없는 동성 간의 성적 이끌림은 '정상'인가? 오랜 세월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죄악으로 치부되어 왔다. 매런과 '리(by 티모시 샬라메)'를 위시한 이터(혹은 사회적 소수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들의 식성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 이터들이 벌이는 사건사고와 어떠한 연관성도 없는 제3자의 입장에 서 있는 우리는 이터들의 식인 행위가 (나아가 이터들로 대변되는 소수자들의 성향이) 그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본능에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역겨웠던 식인 장면은 따라서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처럼 보이게 된다.

피칠갑을 하고 있어도 무섭지가 않아진다고 (출처 : Bloody Disgusting)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서 있는 포식자임에도 불구하고 이터들은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다. 누구와도 관계 맺지 못하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며 길 위를 떠돈다. 설리(by 마크 라이런스), 제이크(by 마이클 스털버그), 매런의 엄마 자넬(by 클로에 세비니)까지, 차례로 등장하는 중년의 이터들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들이 유독 미쳐버린 것이 아니라, 이제 막 본격적인 식인을 시작한 매런과 리가 아직까지는 정상인 거였다는 사실을. 설리가 말했듯이, 오로지 혼자밖에 없는 길고 쓸쓸한 길이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매런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 인간(人間)은 인간 사이에서 살아야 하는 법이다. 고립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 모두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외로운 여정을 떠난대도,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뼈까지 통째로


    추악하지만 섬세하다. 아름다우면서도 지독하고, 건조하게 서글프다. 그러나 이 영화를 심미적, 도덕적인 관점에서 평가하는 일은 잠시 보류해 두자. 그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 <본즈 앤 올>이 모두가 지키려 애쓰는 필사적인 일상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인간이라면 응당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조차 받아들일 수 없고 사랑해줄 수 없는 추한 구석이. 그래서 누군가 대신 끌어안아주고 온전히 이해해주기를 바라게 되는 결핍이. 그래서일까, 예술작품 속에서 사랑에 대한 갈구는 종종 허기라는 감각과 연결된다. 이터들은 모두 사람과 사랑에 목말라한다. 오랫동안 사회에서 거세되어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온 이들의 욕망은 집착으로, 광기로 뒤틀려 나타난다. 그 소름 끼치는 눈빛이 처절하게도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 모두 처음에는 매런과 리처럼 원하지 않는 행위를 어찌할 수도 없이 계속하면서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시달리던,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삶이라는 것을 일구어보려 노력했던, 온갖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희망을 잃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해보려 했던, 서툴고 평범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리라. 제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세상의 풍파에 아무런 대비 없이 내던져진 불운한 청춘이었기 때문이리라.

(출처 : 네이버 영화)

    사랑섭식의 공통점은, 대상을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을 앞둔 리는 매런에게 자신을 먹어달라 청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영화 내내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이어지던 매런과 리의 키스는 매런이 정말로 리를 뼈까지 통째로(bones and all) 잡아먹으며 끝을 맺는다. 괴이하고 끔찍해야 마땅할 이 장면이 이토록 시리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인류 보편의 무의식 속에 이 메타포에 대한 이해가 이미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섭식은 허기를 채우기 위한, 사랑은 공허를 채우기 위한 가장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몸부림이라는.


단 한 마디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지? 루카 구아다니노 x 티모시 샬라메 조합은 무적이다.


여담


    사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이 남았다. 그래서 조금 더 주절대 보려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이어 이번에도 의상이 끝장나게 예뻤고, 테일러 러셀과 티모시 샬라메 둘 다 하늘하늘한 꽃무늬와 그런지 룩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식성과는 반대로 유약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미지를 훌륭하게 구축했다.

사랑스러운 꽃거지들 (출처 : 네이버 영화)

    두말할 것 없이 연기도 흡인력 있었고. 티모시의 묘한 카리스마는 언제나 작품의 매력을 한 차원 끌어올린다. 테일러는 뺨의 하얀 반점까지 같이 연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런이라는 배역에 찰떡이었다. 카니발리즘 호러에 로드무비를 결합한 서사도 흥미로웠지. 곳곳에 숨어있는 상징과 암시들은 하나하나 찬찬히 곱씹어보고 싶어진다. 그중 몇 가지만 간단하게 언급하자면 :


    1) 중반부에 삽입된 리의 꿈을 통해 매런과 리의 길 위에서의 생활 중 상당 부분이 생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먹는 자신을 혐오하는 매런을 위해 리는 대신 살인한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반대로, 아버지를 먹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리에게 매런은 괜찮다고 말해준다. 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그 상황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그의 과거도 모르면서, 단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은 이렇듯 서로의 이름 말고는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두 사람을 놀랍도록 단단하게 연결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2) 매런은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다. 영역을 표시하는 짐승처럼. 또한, 일반적으로 여성 캐릭터가 다리를 벌리는 장면은 성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이 습관은 포식자로서 매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사랑으로 리를 자신의 내부에 받아들이게 될 (혹은 먹어치우게 될) 결말을 암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대해석일지도


    3) 영화 초반에 매런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장면이 여과 없이 중계된다. 왜일까? 등장인물이 볼일을 보는 장면은 이후에 딱 한 번 더 등장하는데, 바로 식인을 동경하는 브래드가 카메라를 등지고 나무에 노상 방뇨하는 장면. 배설이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아직 야성이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지만 타고난 이터인 매런은 집이라는 내부의 공간에서 배설하지만 외부의 시선(관객) 앞에 부끄럼이 없다. 반면 후천적 선택으로 인간을 먹는, 즉 이터들의 야성을 흉내 내고 싶어 하는 브래드는 당당하게 야외에서 배설하면서도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과대해석일지도 22


본즈 앤 올 정식이 유행이라면서요 (출처 : 네이버 영화)


    여기까지 전부 읽으셨다면, <본즈 앤 올>을 재미있게 봤든가, 이 글을 재미있게 읽었든가 둘 중 하나일 테죠. 독자 분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나누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주저 말고 댓글로 알려주세요. 함께 영화 이야기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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